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02
1.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부모
소년 예수의 부모는 매년 유월절마다 그 절기의 관습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분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절기를 다 마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는 함께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이가 일행 중에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 버렸다. 그 후 아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부모는, 비로소 친척과 친지들 사이에서 그를 찾기 시작하였고, 찾지 못하자 아이를 부지런히 찾으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눅 2:41-45).
‘유월절’은 오순절, 초막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 본래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세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일 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을 의무적으로 순례하였다(신 16;16). 유월절은 아빕월(유대력으로 1월에 해당) 14일 하루와 그 이후 연결된 무교절의 일주일을 합하여 8일간 지킨다.
유대인은 보통 이틀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렀는데, ‘그 날들을 마치고’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분의 부모는 8일간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모가 소년 예수를 동행 가운데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부주의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역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몰려든 수많은 사람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북새통을 이루었고 또 마을별로 떼를 이루면서 돌아가던 사람들의 규모도 상당하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것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2. 놀라움 속에 함의된 그분의 정체
어쨌든 요셉과 마리아는 눈에 불을 켜고 찾다가 삼일 만에야 성전에서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성전에 있던 소년 예수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는데, 그분의 말을 듣는 사람이 모두 그 지혜와 대답에 놀라워하였다. ‘선생들’은 유대인 교사들, 즉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을 말한다. 소년 예수는 바로 그들의 가르침 앞에서 듣고 묻는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그 시간은 형식적으로 선생들이 주를 이루고 그분은 종이 되셨지만, 내용 면에서는 그 관계가 바뀌어 있었다.
그분의 문답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저자인 누가는 ‘놀라다’라는 의미를 정확히 나타내기 위하여 헬라어 ‘엑시스테미’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는데, 이 단어는 누가가 주로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하였다(8:56;24:22;행 2:7). 그는 이 단어를 문답의 한가운데에 사용하여, 비록 초자연적인 이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분의 문답과 그 속에 담긴 지혜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가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밝히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분의 정체성,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인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이신 그분의 모습을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그분이 비록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정체, 즉 ‘신성’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그분의 자의식
그분의 초자연적인 문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정체성을 볼 수 있었다면,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때 그분이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하셨다는 점이다. 그분의 문답 장면은 이제 막 잃어버린 아이를 발견한 부모에게도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그 놀람은 곧 이어진 책망 속에 묻혀 버렸다. 특히 어머니의 책망 속에는 아이에 대한 실망감도 묻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부모의 마음을 담고 있는 ‘근심하다’(오두노메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누가만이 사용한 의학 용어이다. 이 단어는 ‘매우 심한 정신적 충격이나 트라우마’를 뜻하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 부모가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책망 앞에서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라는 대답을 기대하였을 부모 앞에서, 그분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그분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았다면 부모에게 그 대답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관계에서 비롯된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모는, 더구나 그분의 대답 속에 질문의 뉘앙스가 역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또 그로 인하여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부모와 아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짐작하건대 ‘서운함’이나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그런 감정을 접고 그분의 모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분의 대답 속에 담긴 의미이다. 그분의 대답 속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이 명확하게 들어 있다. 그분의 생애는 이미 부모를 포함한 인간들의 인식 궤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그분은 그것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계셨기 때문에, 자신이 자기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면서 그 당위성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그분이 언제부터 이러한 자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열두 살 되던 때에는 이미 그것이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그분의 순종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세 번째 사실은, 그분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의식도 있었고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기도 하셨지만, 부모님께 순종하고 받드시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점이다. 그분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셨고, 그곳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지내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그분의 성장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이러한 모습을 견지하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는, 그분이 우리 인간과 똑같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점이다. 그분은 이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인성도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가 알다시피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신 분이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부정하게 되면 이단에 빠지게 된다.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면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고, 반대로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면 영지주의, 즉 이단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분이 인간이 밟아야 할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점은 중요하고 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의미는, 그분이 소년기에 부모님께 순종하고 받드시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소년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부모에게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 준다.
세 번째 의미는, 앞서 그분이 부모에게 하신 대답이 부모를 무시하신 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49절에서 그분은 부모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것은 자칫 그분이 부모의 무지를 무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받드셨다는 것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사실을 되짚어볼 때, 그분은 자신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자기 정체성을 계시하시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셨을 뿐 부모를 무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우리의 반응
소년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 보인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곳은 누가복음이 유일하다. 누가는 그 모습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 사실은 소년 예수의 문답에 들어 있던 지혜와 그것에 놀란 사람들의 반응에서 확인할 수 있고,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신 그분의 자의식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나사렛으로 내려가신 소년 예수는, 자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 결과 그분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이런 모습을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흠 없는 인성도 갖추셨다는 것을 보이셨다.
이런 소년 예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두 가지 반응을 유도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그분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두 번째 반응은, 그분처럼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분처럼 부모에게 순종하고 받들어야 한다. 그 반응이 요구되는 시간과 장소는, 바로 지금 이곳 우리의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