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06
1. 어부들을 부르신 예수님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넓게 펼쳐진 평원에 자리 잡은 성읍이다. 무화과, 감람나무, 종려나무 같은 다양한 나무들이 잘 자라고, 농사도 잘 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수산물도 풍부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호숫가에 서서 그분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말씀을 전하시는 도중에, 그분은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셨다. 그곳에는 어부들이 고기 잡는 일을 마치고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보다’라는 말은, 그냥 무심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시선이 향한 곳이 그 사람의 다음 행선지를 결정한다’라는 말처럼, 예수님도 자신이 보셨던 곳으로 가셔서 한 배에 오르셨다. 배에 오르신 예수님은 그 배의 임자인 시몬 베드로에게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요청하셨고, 이윽고 그 배에 앉아서 무리에게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을 마저 마치셨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조금 전 시선 속에 담아 두셨던 그 관심을 베드로에게 돌리면서 이렇게 명령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조업을 마친 오전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일은, 마치 손님들이 모두 귀가하여 잠들어 있는 시간에 가게 문을 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말씀은 베드로에게 어처구니없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그분의 위엄이 너무 남다르셨기 때문에, 대놓고 그 말씀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잡은 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하였다. 다급해진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빨리 와서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고, 그 요청을 받고 달려온 어부들은 두 배 모두 잠길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 이것을 보고 놀란 베드로는 그분의 무릎 아래 엎드려 아뢰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그러자 예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몬을 진정시키신 후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를 제자로 부르셨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주님은 어부들을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시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보여주셨다는 점이다. 둘째, 주님은 어부들을 부르실 때, 아무 목적도 없이 부르시지 않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다는 점이다.
2.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신 예수님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본 것은 무엇일까? 그분의 말씀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지고 두 척의 배가 모두 가라앉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이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시간에 한두 마리도 아닌 그렇게 수많은 물고기가 잡혔다는 것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된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일까? 성경은 그분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3,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이 만물을 지으셨다고 성경은 명백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천지 만물 가운데 짓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시므로, 어부들이 목격하였던 놀라운 사건은 그분에게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어부들은 또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았을까? 우리는 특별히 베드로의 행동을 통해서, 그가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그분의 거룩하심을 느끼자마자 그분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이렇게 아뢰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밝은 빛이 비칠 때 어둠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듯,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죄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그 거룩함을 감당할 길이 없어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고, 죄인인 자신의 곁에서 주님이 떠나시기를 요청하였다.
3. 목적을 가지고 부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자신의 그런 모습을 먼저 보여주셨다. 이로써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명확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그분은 그들을 부르신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셨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이에 관해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 그래서 사람을 취하는 일은, 우리의 눈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혹은 사업을 크게 일으켜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배우자와 결혼하여 큰 집에서 살고 싶고, 또 멋진 외제차도 몰면서 여유 있게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 속에 있는 점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가치와 비교하면 그것은 바닷가의 모래 한 알보다 작다.
주님은 한 사람의 가치를 이렇게 매기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온 천하와 한 사람을 양팔 저울의 양쪽에 각각 올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사람이 놓인 쪽으로 급격히 기울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가 온 세상의 가치보다 현저히 무겁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목적도 여기에 있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사람을 취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부르셨다. 어부들은 그 부르심에 주저 없이 일어나 따랐고, 그 결과 온 천하보다 귀한 사람들을 취하였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차고 넘치도록 수많은 사람을 취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온 세상을 헤집고 다녀도 결국 우리의 손안에 들어오는 것은, 온 천하 속에 미미한 점보다 더 하찮은 것들이고, 또 그것들은 모두 죽음 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우리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풍성한 열매가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우리 손안에 주어지게 된다. 더구나 그 열매 하나하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래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를 때 주어진다.
1970년대에 대히트를 날렸던 카피가 하나 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 LG전자의 전신이던 ‘금성사’는 이 카피 하나로 당시 텔레비전 시장을 석권해 버렸다. 텔레비전 하나를 결정하는 데에도 순간의 선택이 이렇게 중요한데, 하물며 인생의 좌표를 결정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택의 귀로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 11:30).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과 사람 취하는 일을 선택하였던 어부들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전제
그런데 그 선택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전제가 있다. 우리는 그 전제가 되는 두 가지를 먼저 해결해야만 그분을 따를 수 있다. 첫째,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다.
(1) 성경에는 회개가 죄 사함을 받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그것 없이는 거룩하신 그분과 함께할 수 없고, 그 결과 위대한 일에 참여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얻을 수도 없다.
우리는 시몬 베드로가 그분을 따르기 전에 먼저 회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신 그분 앞에서 죄인의 모습을 한 자신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이전과 다른 삶, 즉 주님을 따랐다.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즉, 주님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이전의 삶에서 돌이켜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 회개의 참된 모습이다. 바로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의 회개를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원을 통해 비로소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성경은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제부터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 되어 제멋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2)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두 번째 전제 조건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어떻게 하였는가? ‘모든 것을 버려두었다’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눅 5:11). 시몬 베드로가 배를 등에 짊어지고 예수님 뒤에서 따라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것은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바보 같은 그 모습을 보면서 포복절도하거나 손가락질해댈 것이다. 만약 우리도 모든 것을 버려두지 않고 그분을 따라가면, 상상 속의 베드로처럼 웃지 못할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원숭이를 사냥할 때 어떤 부족들은 활을 사용한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인도의 어떤 부족들은 이것보다 훨씬 손쉬운 방법을 이용한다. 그들은 코코넛에 작은 구멍을 뚫어 속을 비운 후,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달콤하게 만든 밥이나 과일을 넣고 나무에 단단하게 묶어 둔다. 그러면 원숭이가 맛있는 냄새를 맡고 손을 집어넣어 먹을 것을 움켜쥐게 된다. 원숭이는 움켜쥔 것을 먹기 위하여 손을 빼내려고 하지만, 움켜쥔 손 때문에 작은 구멍에서 자신의 손을 뺄 수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도 움켜쥔 것을 놓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도 바로 그 원숭이처럼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누가가 예수님을 따라갔던 어부들의 모습을 제시할 때 특별히 ‘모든 것을 버려두었다’라는 말을 강조하여 제시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데 돌이킬 수 없는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생명(영생)까지 빼앗길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5. 또 다른 베드로
예수님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무턱대고 또 목적 없이 부르시지 않았다. 그분은 먼저 자신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또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어부들의 두 눈에 똑똑히 각인시켜 주셨다. 또한, 그들을 부르신 목적도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다. 그분을 따르게 되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사람을 취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회개하는 것과 또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밝히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분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도 그 이면에 바로 이런 목적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 위하여 회개하거나 모든 것을 버리면 우리 인생을 빼앗기거나 망칠 수 있다면서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주님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얻기를 원하신다.
만약 믿고 따를 주님이 없었다면 시몬 베드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갈릴리 촌구석에서 물고기 몇 마리를 잡으려고 평생 그물질하다 죽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평생 신기루 같은 재물 등을 쫓다가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믿고 따를 주님이 계신다. 더구나 그분의 간절하신 소망은,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분은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주시고 부활하셨다. 그 소망과 사랑 앞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도 평범한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던 베드로처럼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