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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Nov 30. 2020

예수님에 관한 귀신들의 증언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05


  1.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


  영어 ‘wants’와 ‘needs’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뜨거운 사막에서 길을 잃고 며칠째 헤매고 있었다. 길을 찾는 것이 그 사람의 궁극적 목표이지만, 그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었다. 심한 갈증이 그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목말라 죽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그 사람의 want가 생긴다. 그래서 그의 wants는 그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음료가 된다. 그런데 그때 마침 차를 몰고 사막을 횡단하던 여행객이 그를 발견하고, 목이 타들어 가던 그에게 사막 열기로 데워진 따뜻한 물 한 병을 주었다. 그렇지만 물병을 받은 그 사람은 다짜고짜 화를 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쇼, 그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물을 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렇게 따뜻한 물을 주면 어떡하오? 기왕이면 얼음같이 시원한 콜라 한 잔 주면 얼마나 좋겠소.” 이것이 needs이다. 비록 목이 마를지라도 그 사람은 그 갈증을 따뜻한 물이 아닌 시원한 콜라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행객은 그 사람의 이런 needs를 파악하지 못하고 따뜻한 물을 주었던 것이다.


  이 예화는 기업에서 마케팅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질문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타깃으로 삼아야 하는 소비자가 누구인지, 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상품을 개발하는 기업은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당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는 예화이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것과 유사하다. 물론 그 관계는 마케팅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이 예화가 담고 있는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엉뚱한 곳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이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2. 객관적이고 신빙성 있는 정보


  사람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만약 제대로 알았다면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3년 넘게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모든 말씀과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예수님을 붙잡고 강하게 항변하면서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만류하기도 하였다. 주님의 길을 막은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분이 잡히시던 날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사람들과 제자들의 이런 반응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분의 길을 방해하고, 심지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거나 도망가 버리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호세아 선지자가 강조한 대로 힘써 주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그들과 비교할 때, 영적인 존재인 귀신들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본문 속에서 귀신들의 입을 통해 그분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이 전한 정보는 더욱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귀신들이 ‘기만술’을 쓰지 않는 이상 예수님에 관하여 거짓 정보를 흘릴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기만술을 쓴다 할지라도 앞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의 기만술에 완벽하게 대처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들의 술수 정도에 넘어가실 분도 아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전한 정보는 더욱더 신빙성을 띠고 있었다.



  3. 예수님의 정체


  (1) 갈릴리 호수 북쪽 해안에는 ‘가버나움’이라는 성읍이 있다. 이곳은 예수님 당시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도 있었던 큰 성읍이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후 이곳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더러운 귀신은 그분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알고 있었다.




  해 질 무렵에는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그분이 일일이 그들 위에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실 때, 병에 걸렸던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눅 4:41). 이번에도 귀신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귀신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도 가장 핵심 되는 성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전에 왔던 선지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메시아(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의미는, 우리가 거룩하신 그분을 높이고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대로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둘째 의미는, 그분이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2) 더러운 귀신의 입에서 나온 증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거룩하신 예수님이 악의 세력을 멸하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눅 4:34a).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한 귀신의 말은, 그 속에 ‘왜 우리를 방해하십니까(혹은 괴롭히십니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방해는 구체적으로 더이상 악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진멸하는 심판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귀신과 주님 사이의 팽팽한 긴장 관계는, 양측이 말을 나누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귀신은 죄악으로 물든 ‘더러운’ 존재이다. 그에 반하여 예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빛과 어둠이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더러움과 거룩함도 공존할 수 없다. 싸움에서 패한 둘 중 하나는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한 마디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의 꾸짖음에 자기 스스로 알아서 도망쳤다.




  도망가게 놔두는 것은 최선책이 아니다. 허점이 보이면 다시 찾아와 발톱을 세울 것이 너무도 빤하므로, 그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아예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 최선책이다. 즉 더러운 귀신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대로 ‘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더러운 귀신을 소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 바로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그분은 십자가로 원수 된 것,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았던 악의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셨다.



  4.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귀신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거룩함의 반대편에 있는 더러운 귀신, 즉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모든 악의 세력을 소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모두 소멸시켜 버리셨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길은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무사통과할 수 있다. 성경은 그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는 방향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그분으로부터 도망쳤다. 반대 방향으로 가 버렸다. 그 결과 그는 소멸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그 귀신이 취하였던 태도를 버리고, 그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앞서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야 한다. 그분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귀신처럼 소멸되는 존재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그분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고, 거룩하신 그분처럼 우리도 거룩한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진다. 그 기회가 지금 활짝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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