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택 Dec 02. 2020

위험 지대와 안전지대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07


  1. 위험 지대와 안전지대


  예전에 어느 방송사의 ‘나는 몸신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날 당뇨병과 관련 있는 인슐린 과잉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인슐린 검사를 받은 출연자 다섯 분의 반응이었다. 왼쪽에 앉은 출연자부터 차례로 검사 결과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두 분은 ‘안전지대’에, 다른 두 분은 ‘위험 지대’에, 나머지 한 분은 ‘중간 지대’에 위치하였다. 위험 지대에 있는 분들의 얼굴에는 실망과 두려움이 비쳤고, 안전지대로 판정받은 분들은 안도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나머지 중간 지대에 머문 분은 다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면서, 수십 가지의 호르몬 중에 ‘인슐린’ 하나의 이상으로도 이렇게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는데, 만약 여러 가지 호르몬이 동시에 문제를 일으키면 그 희비의 쌍곡선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이거나,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축복과 저주의 문제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 지표가 죽음과 지옥을 의미하는 저주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아마도 실망과 두려움을 넘어 절망과 공포로 주저앉을 것이다.




  나는 십여 년 전에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수술받기 전에 잠시 응급실에 누워 검사를 받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이 연체동물처럼 스르르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암을 판정받고 그 절망감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시작에 불과하다. 암을 치료하기 위하여 암과 고통스럽고 기나긴 전쟁을 치러야 하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으로 인하여 극한의 두려움(공포)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은 그녀에게 저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우리의 영원과 맞닿아 있는 문제라면 어떨까? 그래서 암보다 더 무섭고 절망스러운 심판 가운데 처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그 여성이 보였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 절망과 절대 두려움 속에서 몸부림을 칠 것이 뻔하다. 누가복음 6장 20-26절 말씀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고, 그래서 저주받은 인생이 되지 말고 축복받은 인생이 되라고 촉구하고 있다.



  2. 축복받은 사람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수많은 제자 가운데 열두 명을 사도로 세우셨다. 그 일 이후 주님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 계실 때, 수많은 제자와 백성이 말씀을 듣고 병도 고치려고 그분께 몰려들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평지 수훈’(설교)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를 ‘산상 수훈’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분이 맨 처음 하신 말씀은 ‘축복과 저주’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수님은 먼저 축복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그들 모두는 축복이 아닌 저주받은 사람 같은데, 그분은 그들이 바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말씀하신 그 사람들을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가난한 사람’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경제적인 궁핍에 처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가리킨다. 동일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마태는 그를 특히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밝히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일까? 헬라어에서 ‘가난’은 구걸해야 할 정도로, 즉 남에게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궁핍한 상태를 뜻한다. 또한, 시편에서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경건한 사람을 의미한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따라서 그분이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에게 왜 복이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20절).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주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마태는 구체적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가리키고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의 반대말은 ‘죄’다. 그래서 의에 주린 사람은 자신의 죄를 버리고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으므로, 그 간절한 만큼이나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길을 찾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왜 그분께 나아갈 수밖에 없을까? 하나님만이 의로우시고, 그분만이 그 사람을 의롭다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시 7:11).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축복이 주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의로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21a절).




  세 번째는, ‘우는 사람’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고만 있는 것일까? 슬프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은 ‘슬프다’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원통한 일을 겪거나 불쌍한 일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마태는 ‘울다’를 ‘애통하다’는 단어를 사용하여 통곡하면서 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 사람이 이렇게 통곡할 만큼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이유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로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서(롬 3:23), 그리고 그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히 9:27). 죄로 인해 받는 고통을 다윗은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시31:10). 그렇다면 왜 이렇게 죄 때문에 애통할 때 복이 있는 것일까? 슬픔 가운데 죄를 회개하는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에, 또 그 소리를 들으신 그분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의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기 때문이다(21b절).




  마지막 축복 대상자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미움받고 욕먹고 버림받는 사람이다(22절).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뼈아픈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은 별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므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바로 그 일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데, 주님은 바로 그때 낙담과 슬픔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바로 그때 그에게 (하늘에서) ‘큰 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23절).



  3.저주받은 사람들


  이와는 반대로 저주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축복받은 사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다.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배부른 사람’은 죄를 짓고 사는 것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웃는 사람’은 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좀처럼 느끼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짓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칭찬받는 사람’은 사람들이 그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경고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괜찮다’, ‘잘하고 있다’고 아부하기 때문에, 그 말만 믿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문제의식이나 아무 대책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주리고, 애통해하면서, 죽음과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화를 당하는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4. 저주에서 축복으로


  주님이 평지 수훈의 첫머리부터 축복과 저주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라 축복받는 인생을 살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가는 길(방법)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가난한(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간절하게 찾듯이, 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게 찾듯이(시 42:1) 그렇게 그분께 나아가면 된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왔던 죄악을 회개하면 구원받는 축복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삶을 살면, 우리 인생은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뀌게 된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다.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주님은 자신이 오신 그 목적대로,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선물로 안겨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우리는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기 원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이 하셨던 일, 즉 그분의 죽음과 부활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외면하고 잊게 될 경우, 우리는 저주 아래 머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서 제시한 축복받은 사람들처럼, 그분을 믿고 또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위험 지대’는 질병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 질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슬프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위험 지대’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고통과 슬픔 가운데 몰아갈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안전지대’는 질병이 없는 곳이다. 거기에는 아픔과 슬픔 대신 건강함과 기쁨만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그분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게 되면, 그분이 주신 생명과 풍성한 삶으로 인하여 넘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목마른 사슴이 맑은 시냇물 앞에서 물을 마시지 않고 주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갈급함만큼이나 더욱 급하게 덤벼들면서 마시려고 한다. 오늘 이 시간이 바로 그 사슴과 같은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전 06화 사람 낚는 어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