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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03. 2020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08


  1. 누가 더 사랑하겠는가?


  한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1억 원의 빚을 졌고, 다른 사람은 10억 원의 빚을 각각 졌다고 가정해 보자. 두 사람 모두 경제적인 능력이 안 되어 제날짜에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돈을 빌려준 사람이 은혜를 베풀어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면,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빚을 면제해 준 사람에게 더 감사할까? 다시 말해서 누가 더 그 사람을 사랑할까? 당연히 빚이 열 배나 많은 사람이 열 배는 감사할 것이다. 누가복음 7장에 바로 그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셨다. 함께 식사하자고 초청한 그의 요청에 주님이 흔쾌히 따라나선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죄 많은 여인이 그분의 뒤로 와서는 그만 그 발 곁에 서서 울면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기 시작하였다(38절).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인 시몬은 마음에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약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이고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39절) 시몬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이분이 만약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가 자기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였을 터인데, 그냥 만지게 놓아둔 것을 보면, 이분은 그녀가 죄 많은 사람인 사실도 모르고 있고, 따라서 이분은 선지자도 아니다.’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주님은 그에게 앞서 던진 가정과 유사한 질문을 하셨다. 그 질문 앞에서, 시몬은 10억 원 빚진 자가 1억 원 빚진 자보다 빚을 모두 면제해 준 사람을 더 사랑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1억 원을 빚진 자는 시몬을, 10억 원을 빚진 자는 죄 많은 여인을 가리킨다.



  2. 여인의 많은 죄


  본문 속에 나오는 여인은 ‘많은 죄’를 지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데(47절),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어떤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던 것일까? 지금은 여성들의 일자리가 많아 큰돈 벌기는 어렵더라도 카페나 편의점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또 공격적으로 가게를 운영한다면 보다 많은 수익을 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는 여인들의 경제 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기껏 해 봐야 남의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줍거나, 이웃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입에 풀칠하는 정도가 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 여인에게 값비싼 향유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녀는 이런 일들을 통하여 경제 활동을 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값비싼 향유’와 ‘많은 죄’를 연결해 보면 그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녀를 ‘죄인’으로 낙인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 여인과 비교하면, 바리새인인 시몬의 죄는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주님의 질문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주 하나님이 두 사람의 빚을 면제해 주신다면 누가 더 그분을 사랑하게 될까? 누가 더 그분께 감사할까? 당연히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죄를 지은 여인이다.



  3. 여인이 주님께 나아간 이유


  그녀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게 되었다(37절). 예수님이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인은, 그 집으로 들어갔고 그분 뒤편으로 가서 그 발 곁에 섰다. 벌건 대낮에 그 집으로 가는 매춘부의 발걸음은 얼마나 불편하였을까? 또 그 집 안으로 들어설 때는 얼마나 더 괴롭고 힘들었을까?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고, 창녀라고 비웃는 소리와 저주하는 손가락질이 그녀의 귀와 눈에 칼날같이 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비난을 뚫고 주님께 나아갔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 때문에 주님을 찾아갔던 것일까? 그 많은 비웃음과 저주를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그분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인의 그런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 즉 자신이 지은 많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에게는 주님께 나아가면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사람들로부터 그동안 받아 왔던 손가락질과 저주에서 벗어나 온전한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인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달려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님은 여인의 모든 행동 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 주님은 그녀의 행동에서 그녀의 믿음이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뿐 아니라 그녀가 주님을 향하여 달려오기 전부터, 그 마음속에 죄 사함에 대한 믿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죄 많은 여인이 자기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용납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어떻게 해서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 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실 뿐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수없이 계시해 주셨다. 그때마다 그분의 소문은 온 유대 땅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청각 장애인이 아닌 이상 누구나 그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사람 안에 바로 ‘그녀’가 들어 있었고,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소문을 사실로 믿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여인이 접한 것은 고작 사람들이 전해 준 소문에 불과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소문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을 소문 그대로 믿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떤가? ‘사람들이 전한 소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참 진리 되신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듣고 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6-7).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이 여인의 믿음보다 못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는 그 믿음을 적어도 여인이 가졌던 믿음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여인이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4. 행동으로 표현된 여인의 믿음


  예수님은 여인이 표현한 믿음을 시몬의 행동과 비교하여 소개하셨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절).




  유대인의 일반적인 관습은, 귀중한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올 때 종을 시켜 그 사람의 발을 물로 깨끗하게 씻겨 준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와 비교할 때, 여인은 물 대신 눈물로 그분의 더러운 발을 적셨고, 수건 대신 자신의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렸다(44절). 여인의 눈물에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죄에 대한 통회가 들어 있었고, 그 눈물이 그분의 온 발을 흥건히 적셨다. 여인은 울고만 있지 않았다. 곧이어 자신의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여인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고, 그러한 행동은 이혼 사유까지 될 수 있었다. 그 수치를 무릅쓰고 더구나 수건도 아닌 자신의 머리털로 더러운 발을 닦기까지 함으로써, 그분 앞에서 나타낼 수 있는 최대의 ‘경외감’을 표현하였다. 여인은 그러한 모습으로 그분을 영접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시몬은 그분이 들어오실 때 그분께 한 번도 입을 맞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인은 그분이 들어오실 때부터 그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45절). 입을 맞추는 행위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예절이다. 시몬은 이것을 무시한 반면, 여자는 적극적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도 그분의 입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발에 입을 맞추었고, 한 번도 아니라 그분이 들어오실 때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하였다. 발에 입을 맞추는 행동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행위이다. 종은 그 행동을 통하여 주인을 향한 존경심과 함께, 주인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마음을 표현한다. 여인은 바로 그 마음을 실어 그분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은 것이었다.




  주님이 세 번째로 비교하신 것은 ‘감람유’와 ‘향유’였다. 시몬은 그분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인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46절).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지극히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이에게 하는 일이고,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주께서...기름을 내(다윗의)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 133:1-2).


  ‘감람유’는 당시 흔하였던 감람나무 열매에서 짜낸 기름이다. 시몬은 그 흔한 감람유조차 그분의 머리에 붓지 않았다. 그와 비교할 때, ‘향유’는 그 가치와 가격 면에서 감람유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특히 ‘나도 향유’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500g에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삼백 데나리온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여인은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 향유를 그분의 머리도 아닌 발에 부음으로써, 그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러한 그녀의 마음속에는 지극히 고귀하신 예수님을 향한 존경, 사랑, 겸손, 헌신,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5.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신 목적


  여인의 믿음은 주님 앞에서 표현된 그녀의 행위에서 나타나지만, 그 믿음은 주님을 향해 달려오던 그 발걸음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 믿음으로 여인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 그렇지만 주님은 시몬의 집으로 들어온 여인에게 그 자리에서 ‘죄 사함’을 선언하시지 않고, 그 믿음이 사랑(감사)으로 모두 표현된 뒤에야 비로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여인의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여인의 모습을 보고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라고, 그래서 여인처럼 사랑(감사)을 표현하라고 그렇게 하셨다. 만약, 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특별히 두 번째 이유(목적)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은 여인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앞서 밝혔듯이 여인은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그분께 나아가면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믿음은 실제로 그분 앞에서 그대로 표현되었다. 그녀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사람들의 소문’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그분의 모습을 직접 듣고 접하고 있다.




  주님은 그것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심으로 그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눅 5:24-25). 이런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또 우리에게 이런 축복을 약속하신다. “누구든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 10:13). “영접하는 자 곧 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그 여인보다 더 굳건하게 믿을 수 있다. 그 여인이 ‘소문’으로 접하였다면, 우리는 ‘성경’으로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여인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럴 때 죄 많은 여인이 죄 사함을 받고 평안히 갔던 것처럼, 우리도 많은 죄를 모두 면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과 함께하는 축복, 즉 평안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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