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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08. 2020

오병이어의 기적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0


  1. 예수님과 제자들의 갈등


  예수님은 벳새다로 발길을 옮기셨다.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 즉, 요단강물이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입구에서 북동쪽 약 1km 지점의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있는 성읍이다. 주님이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그곳으로 향하신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과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었거나 기도하시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무리가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주님은 그런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영접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고 병 고칠 자들도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9장에 바로 이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주님이 무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고 계실 때 날이 저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나아와서 그분께 이렇게 여쭈었다. “무리를 보내어 여러 마을과 촌으로 가서 머물고 먹을 것을 얻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여기에서 ‘빈 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따라서 날이 저물면 그곳에서 더이상 머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기 때문에, 무리가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이를 미리 내다보고 대안을 제시한 제자들의 처신은 현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주님의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당황해하면서 볼멘소리로 다시 여쭈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않고는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5천 명 정도 되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주님보다 제자들의 말이 더 이치에 합당하게 보였다.


  요한은 이 기사를 소개할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의 대답을 이렇게 적고 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입니다.”(요 6:7)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따라서 이백 데나리온은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천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다. 그 돈으로 떡을 사서 각 사람에게 조금씩만 나누어주어도 부족하다는 것이 빌립의 결론이었다. 더구나 그 많은 것을 마을로 내려가서 사 가지고 오는 것보다 그들 모두 마을로 내려가게 하여 사 주는 편이 시간도 절약되고 훨씬 효율적이기도 하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견해차로 인한 ‘갈등’이 생겼다.



  2. 갈등의 원인


  (1) 그렇다면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갈등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 그 원인은 제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 앞에 서 계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앞선 누가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시는 도중에 광풍과 거센 파도로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른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들은 광풍과 거센 파도를 한마디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이분이 누구이시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자 순종하는가”라면서 놀라기도 하였다. 또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였을 때도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을 말씀으로 고쳐주시고, 군대 귀신을 돼지 떼와 함께 호수에 몰사시키시던 그분을 목격하였다. 그런가 하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그분의 옷 가를 만지자 치료와 함께 구원받는 것을 보았고, 회당장인 야이로의 죽은 딸을 그분이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시는 것도 두 눈으로 분명하게 목격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이 광풍과 거센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 군대 귀신을 몰사시키시고, 불치병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면, 무리의 숙식 문제를 해결하시는 일은 그보다 더 쉬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앞서 보이셨던 예수님의 능력과 지금 빈 들에서 처한 상황을 연결하는 눈이 없었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이었다.




  (2)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두 번째 원인은, 제자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갈등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벳새다로 발걸음을 옮기시기 전에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신 주님은,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그들을 내보내셨다(9:1-2). 예수님께 능력과 권위를 받은 제자들은, 나가서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기도 하였다(6절).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믿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따라서 그분의 말씀은 제자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이런 의도를 품고 계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이 일을 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 금방 못한다고 투덜거리잖아. 이제부터 진짜 내 능력을 보여 줘야지.’ 만약 이런 의도가 있었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가 될 수 없다. 그분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이미 주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하얗게 망각하고 있었다. 즉,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그 믿음 대신에 볼멘소리로 투덜거리기만 하였다. 그래서 그들과 주님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둘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던 것이다.



  3. 만약 갈등이 없었다면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제자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능력과 권위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믿고 행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 말씀도 달리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놀라운 일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 버렸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하여 그분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첫 번째 시사점은,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이해와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 생길 수 있도록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없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능력이나 권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요 1:12), 그 권세로부터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그 능력과 권위도 저절로 주어진다.


  두 번째 시사점은,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이해와 믿음이 있다면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로 이미 죽은 믿음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그런데 이해와 믿음은 있는데, 그 이해와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구하기만 하면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꾸만 의심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 결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




  주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은 중요하다. 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주실) 능력과 권위를 제대로 알고 믿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이것이 있든 없든 주님께 나아가 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없다면,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면 된다. 반대로 만약 있다면, 그 있는 것을 순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구하면 된다. 그렇게 할 때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고, 있는 것은 더 풍성하게 있는 것으로 변한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4. 오병이어의 기적


  주님은 제자들이 만들어 놓은 갈등과 긴장 상태를 확대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부족한 이해와 믿음을 꾸짖는 대신에, 자신이 하실 일을 하셨다. 그들에게 사람들을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히라고 말씀하신 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들 모두가 먹고 다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나 거두었다. 이 기적을 통하여 주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 기적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그들 가운데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9).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은, 그 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도마는 그런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그렇다면 우리도 베드로나 도마처럼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고백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분이 하셨던 일들을 똑같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주님은 지금 우리가 오병이어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계신다. 그 일은 주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믿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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