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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09. 2020

선한 사마리아인과 참된 이웃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1


  1. 강도를 만난 사람의 처지


  어떤 사람이 강도들을 만났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36km 정도 된다. 부지런히 걸어가면 하루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의 고지대에 있고,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낮은 해발 마이너스 250미터의 저지대에 있다. 따라서 그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험하여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최근까지도 그곳에 강도의 출몰이 잦았다고 한다.


  강도는 어떤 사람의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한 후, 그를 그냥 버려두고 가 버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그 사람은 그냥 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2.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일까?


  (1) 제사장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였다. 여리고는 제사장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그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기 직무를 마치고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종교 지도자였으므로 죽어가는 사람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하였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레 19:18)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말씀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피해 가 버렸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피해 가 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본문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의 신분이 ‘제사장’이고, 또 ‘피하여 갔다’는 말 속에서, 그 정황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도와주다가 만약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이는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은 시체 만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특히 제사장들은 죽은 자 만지는 것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레 21:1).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피하여 다른 길로 가 버린 것이었다.


  제사장의 이런 행동 속에는 상대방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가 들어 있다. ‘사랑’의 특징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데 있다(고전 13:5).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제사장의 행동 속에는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레위인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두 번째로 발견한 사람은 레위인이었다. 하지만 그도 앞선 제사장처럼 쓰러져 있는 사람을 피하여 가 버렸다. 레위인은 제사장처럼 직접 제사를 주관하지 않지만, 제사장의 일을 도우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고, 또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반 업무를 수행하였다(민 8:16). 그뿐 아니라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였다(신 33:10). 그러므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내용 중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레 19:18)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위인은 자신이 가르쳤던 말씀대로 하지 않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외면해 버렸다.


  이런 레위인의 외면 속에는 두 가지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첫째,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지 않았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이신 예수님(요 1:1,14;20:28)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따라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은 레위인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던 레위인의 신분을 고려해 볼 때, 치명적인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쓰러진 채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함으로써,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를 동시에 범해 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죄는 앞서 레위인과 똑같은 행동을 하였던 제사장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들에게 영생이 허락될 리 없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주님은 역질문으로 대답을 갈음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5-26절). 그러자 그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27절). 그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두 사람, 즉 제사장과 레위인은 ‘살길’을 잃어버렸다. 즉 영생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영생이 아니면 죽음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3) 사마리아인


  사마리아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행 도중에 거기 이르러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를 본 사마리아인은 제일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고, 이윽고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를 돌봐 주었다. 국어사전은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을 ‘긍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긍휼’은 하나님의 성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킨다.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단 9:18).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많고’도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우리의 크고 많은 죄를 모두 사해 주실 수 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바로 그러한 긍휼이 있었다.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하여’ 간 것과는 다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다. 응급 처치를 마친 후에도, 자기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 주었다. 그의 돌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이튿날에도 그는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20만 원 정도)을 주면서, 그 사람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돌봄은 거기에서 끝났을까? 아니다. 만약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는 그 사람을 돌보기 위하여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 그대로, 자신의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자신의 소중한 돈과 시간을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다. 유대인들은 그런 그들을 창녀나 세리처럼 취급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던 것에 반하여, 정작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은, 그것도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였다.




  영생 얻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정답으로 제시하였던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이런 심중이 들어 있었다. ‘설마 이방인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주님은 앞에서 나눈 이야기 끝에 이렇게 질문하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당신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이 율법 교사의 대답에 들어 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3. 영생의 길과 사랑의 관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름의 소망을 품은 채 살아간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아이, 민족과 국가에 따라 그 소망은 여러 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그 축복을 싫어하거나 멀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의 인사말에는 축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국어사전은 ‘축복’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행복을 빎, 또는 그 행복’, ‘하나님이 복을 내림’. 그리고 그 행복은 이 땅에서 풍성하게 사는 삶과 함께,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런 삶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어떻게 하면 받아 누릴 수 있을까? 본문에 제시된 말씀대로 하면 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면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다(27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이다. 마치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연인을 믿고 자기 인생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사람이다(요 1:12).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축복받은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는’ 길, 즉 영생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런 이유로 하나님과 분리된 인생은 사랑할 수 없고, 그 결과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하는 것은 ‘죄’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의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쏟으심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 즉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그 길은, 그 길을 열어 놓으신 분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무사통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믿고 영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축복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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