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3
1. 바리새인들의 누룩
누가복음 12장은 ‘그동안에’라는 말로부터 시작된다.
앞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나누시면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그 일로 모욕감을 느낀 종교 지도자들은, 거세게 달려들면서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물었고, 그 과정에서 그분을 책잡기 위하여 노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에’라는 말은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때를 말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실 때,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 예수님은 무리 앞에 서서 그들보다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외식’(外飾)은 문자적으로 ‘배우’, ‘각색’을 의미한다. 배우는 관객 앞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배우의 연기 속에는 자신의 본래 모습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각색된 인물의 모습만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대로 표출될 뿐이다. 그 모습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따라 배우의 실력이 매겨진다. 그것이 어설프면 아마추어이고, 진짜처럼 보이면 프로로 인정받는다.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이 분야에서 프로 중의 프로였다. 그들은 백성들의 인정과 존경을 한몸에 받기 위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과는 상관없이 각색된 모습만 보여 주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사랑이 아닌 탐욕과 악독으로 이웃을 괴롭히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 결과 공의와 하나님에 관한 사랑도 저버렸다(눅 11:39-44).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로 ‘외식’이라고 규정하신 것은 너무 적절한 표현이었다. ‘외식’은 ‘위선’을 가리키는데, 국어사전은 ‘위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위선자인 그들의 모습이 정작 문제가 된 이유는,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있었다. 주님은 그 영향력이 누룩과 같다고 표현하셨다. ‘누룩’은 알코올을 발효시켜 술맛을 내고, 빵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이다. 그렇지만 바리새인의 누룩은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나쁜 발효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의 누룩, 즉 그들의 위선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2.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1) 복음을 방해하는 외식
그렇다면 그들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 가득한 삶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빤하다. 복음은 ‘진리’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거짓’이다.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거짓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도 거짓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책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교회사’ 강의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돋보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더욱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 취급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행동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전하는 우리를 위선자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숨길 수 없는 외식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 겉모습을 위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일시적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앞에서 모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푼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지만 그 죄를 계속 숨기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가 없다고 계속 발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선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숨길 경우, 즉 계속해서 위선으로 도배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막 3;29).
(3) 심판에 이르는 외식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런 사람에게 심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더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끝에서 이번에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그 외식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7-59).
무리를 고발하는 주체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 등이다(요 5:45;롬 11:2-3). 모세와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도 고발의 주체가 되신다. 고발하는 자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끌어가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가장 사소한 죄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나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감옥’은 심판 장소인 ‘지옥’을 의미한다. 마가는 지옥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지옥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외식이 주는 매력, 즉 죄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죄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도, 암에 걸려 내일 죽게 되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죄가 주는 쾌락을 지옥과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 한가운데로 몰려드는 나방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3. 화해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외식하는 자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일까?(눅 12:42) 만약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라면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이다. 반대로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단 하나의 사소한 죄까지라도 갚지 않으면 지옥 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
자가 진단 결과 자신이 외식하는 자로 판명되었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이 제시하신 방법대로 재판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화해하기를 힘써야 한다. ‘화해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놓아 주다’, ‘자유롭게 하다’, ‘구원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화해하기를 힘쓴다’라는 말은, 고소당한 죄에서 구원받고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전심전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고소한 사람에게 자신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통곡하며 두 손 두 발 모두 싹싹 비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회개 속에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누가복음 15장에는 너무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바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신의 분깃을 받은 후에, 객지에서 허랑방탕하면서 모든 재산을 낭비해 버렸다. 거지 같은 삶에 지친 아들은 할 수 없이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누가는 그런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0,22-24절).
이런 감동적인 모습은,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힘쓸 때 바로 오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