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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14. 2020

좁은 문과 넓은 문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4


  1. 구원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구원받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예수님은 유대 지경과 요단강 저편의 베레아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계셨다. 그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에 오신 최종 목적을 이루실 것이다. 각 성과 마을로 다니시면서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사람이 그분께 여쭈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 내용이 누가복음 13장 22-30절에 소개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구원에 관한 문제, 특히 구원받는 자가 얼마나 될까에 대한 문제는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구원받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숫자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궁금증을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절).




  마태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도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 따라서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적은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강조하셨다.



  2. 많은 사람이 멸망의 문으로 몰리는 이유


  (1)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착각’ 때문에 그렇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도 넓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이고 편안해 보이는 길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 문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몰리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이들도 많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이 생명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 여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문을 향하여 가고 있으므로,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이 길이 맞으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겠지?’,

  설마 이 많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하지만 성경은 같은 표현으로 두 번씩이나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16:25). 큰 문과 넓은 길은 좁은 문과 협착한 길에 비해 더 바른 것처럼 보인다. 그 누가 보아도 그 문과 그 길이 더욱 매력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쪽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그 길은 끝장에 가서는 사망의 길이다.”




  (2) 많은 사람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몰리는 두 번째 이유는, 그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행위를 ‘죄’로 규정하셨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19-21).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어둠 속에서 행한 악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빛을 미워하고, 그 미움은 다시 빛을 향하여 적대 행위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증상을 보였던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예루살렘 사람들이다.




  본문에는 이미 닫혀 버린 문 앞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걸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집주인은 애걸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자 그들은 집주인이 자신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집주인의 대답은 냉담하였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행악하는 모든 자여 나를 떠나가라.” 그들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또 주님도 자신들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집주인이 자신들을 알고 자신들도 집주인을 알고 있다는 논리를 폈지만, 집주인은 그들에게 너희들을 알지 못하니 나에게서 떠나가라고 물리쳐 버렸다.




  그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고 주님도 그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은, 둘 사이에 이미 안면도 있고 깊은 관계도 형성되어 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이 그들을 물리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들의 그런 행위 속에 죄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지만, 몸만 그곳에 있었지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대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렸다(눅 11:42).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자들을, 또 말씀을 듣고 하는 척만 하고 반대로 행동하는 자들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른다.




  ‘위선’ 자체로도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크나큰 죄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위선이 정작 악한 것은 그 위선을 감추기 위하여 또 다른 죄를 짓기 때문이다. 위선을 감추는 것이 수동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짓는 죄는 공격적이다. 그런 공격성이 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주님이 파송한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쳤다. 이번에는 주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음같이 그들을 모으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 품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3. 큰 문을 선택한 사람들의 최후


  많은 사람이 착각으로 인하여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나아간다. 또 빛보다 어둠을 더욱 사랑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의 문으로 들어간다. 빛 되신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어둠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빛을 미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최후는 참혹하기 짝이 없다.


  그 비참한 최후가 28절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지만, 그들은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그 비극적인 상황을 보고 밖에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았다. 그것이 얼마나 슬펐으면 이를 갈고 있을까. 마가는 그 비참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이런 상황에 빠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운명을 자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협착해 보이고 큰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넓어 보이기 때문에, 그 착각 속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 죄를 짓기 때문에, 불행한 길을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미련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잠 1:7;7:22;12:15;렘 4:22). 우리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선택하는 미련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도 협착하지만,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강조하신 그대로 오직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렇다면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문이 영생으로 인도하므로, 좁은 문은 일차적으로 ‘회개’와 ‘믿음’을 가리킨다. ‘회개’는 그분을 주님으로 믿지 않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아온 죄를 돌이키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회개가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또한, 그 구원은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좁은 문’의 이차적인 뜻은, 세상의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은, 그 결과 그분과 함께 그분이 제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작고 답답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세상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다. 작고 좁은 세상이 아닌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삶은 훨씬 더 자유롭고 거기에서 얻는 열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성하다.


  사람들은 더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하여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선택 뒤에 참된 자유와 풍성함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다. 정반대로 죄의 종이 되어 얽매이는 생활을 하고, 풍성함은 맛도 보지 못한 채 열매 없는 수고만 하고 있다. 주님을 믿으면 멍에를 진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믿지 않은 것으로 짊어지는 멍에가 훨씬 더 어렵고 무겁다.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예수님은 본문 말씀 끝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셨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29-30절).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주인 되어 살아온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주인으로 믿은 사람들이다. 또 주인 되신 그분과 함께하면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선물은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활짝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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