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6
1. 예수님이 오신 목적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만 소개되고 있다.
첫 번째 비유는, 양 일백 마리가 있는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게 되자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는,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그중에 하나를 잃게 되자 그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 안을 부지런히 찾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비유는, 집을 나간 아들이 허랑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산을 탕진한 후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 가지 비유는 이야기의 소재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형식과 주제를 담고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누가’이다. 누가는 의사였으므로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비교할 때 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내력을 기술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이런 누가가 동일한 형식과 주제를 담고 있는 비유들을 소재만 달리하여 세 번씩이나 제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 비유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너무도 중요하므로, 그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 한번은 세리인 레위가 주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는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방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동일 주제를 가진 세 개의 비유를 중첩해서 제시함으로써 주님이 오신 그 목적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의미도 구체적으로 쉽게 알 수 있도록 배려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소개되고 있는 내용으로, 일명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다. 앞선 두 개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것들과 비교할 때 세부적인 묘사가 생생하고 당시 관습과 법적 절차 등도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이 허랑방탕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내용이다. 둘째 부분은, 그렇게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2. 집을 나간 아들
(1) 어떤 이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요청하였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절) 그러자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살림을 각각 나누어 주었다. ‘분깃’은 ‘유산’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재산을 유산으로 나누어줄 때, 장자에게는 차남보다 두 배나 많은 재산을 물려준다(신 21:17). 둘째 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 그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현금으로 바꾼 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면서 모두 낭비하여 버렸다.
‘먼 나라’는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치고 있었으므로, 그곳은 이방인 지역이고 죄가 만연한 지방이다. 또 ‘허랑방탕하다’라는 말은 그 재산을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위하여 쓰지 않고 자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30절에 보면 이런 둘째에 대한 맏아들의 비난이 나오는데, 그는 동생이 창녀들과 함께하느라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둘째 아들은 죄로 가득 찬 이방인 지역에서 죄가 주는 유혹에 빠져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허비한 결과 거지가 되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다. 눈이 내린 곳에 또다시 서리가 내린다는 뜻으로, 어려운 일이나 환난이 거듭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거지가 된 아들의 상황이 바로 이러하였다. 풍년이 들어야 거지도 제대로 빌어먹고 사는데, 그 지역에 흉년도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그의 궁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나라 백성 중의 한 사람에게 붙여 살면서 들에 나가 돼지를 쳤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의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어 배를 채울 수 없었다.
‘쥐엄나무 열매’는 콩처럼 생긴 열매 안에 단맛이 나는 아교질 내용물이 들어 있다. 이 열매는 돼지, 소, 말과 같은 가축의 먹이로 주었는데, 기근이 일어나면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도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그것을 먹기도 하였다. 즉, 죽을 지경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았던 것이 쥐엄나무 열매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에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사실은 사람들이 허랑방탕하였던 그를 비웃고 따돌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굶주리는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었다.
둘째 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가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간 것은,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길로 가 버린 인간들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면서 뭔가 해 보기 위해 하나님 곁을 떠난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둘째 아들의 모습처럼 허랑방탕한 생활과 빈곤, 그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경고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예수님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지만, 반대로 그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른 가지처럼 밖에 버려지게 되고, 종국에는 불에 던져 태워지는 심판까지 받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애초 하나님 곁을 떠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야 한다. 그분 곁을 떠나면 자유롭게 살면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도 안 된다.
(2) 만에 하나 그런 착각 속에서 하나님 곁을 떠났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허비한 후 절망 속에 빠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착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아니다’, ‘나는 괜찮다’라는 착각이다. 하지만 그런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 결과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과 심판보다 더욱 절망스러운 상황이 있을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은 모두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나는 아니다’, ‘나는 괜찮다’라는 착각에서 빨리 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키는 모습이다.
굶주림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절망감을 느꼈던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키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 그의 첫 번째 자각은, 품꾼들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들은 비록 종이지만 양식이 풍족하다. 하지만 그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려 죽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죽음과 심판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
그의 두 번째 자각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18-20a절). 그는 이러한 상황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났고, 따라서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런 생각만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대로 일어나서 아버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아들의 인식과 행동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회개’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인식과 행동 속에는 ‘회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모범 답안처럼 들어 있다. 회개는 둘째 아들처럼 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것, 즉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온 죄 때문에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죄를 뉘우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분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 곧 그분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요 1:12).
3.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일까?
그것이 본문 속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인상적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b절).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는 걸어오는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기며 마구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산등성이로 올라가 날이면 날마다 먼 곳을 바라보면서 아들을 기다렸을 것이다. 돌아오는 아들을 보면서 “이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려야지” 하며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아들의 모습이 불쌍하게 보였다.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는 대신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 위해 달려갔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죄를 범한 사람이 비록 회개하였어도 세상 사람들은 보통 그를 감옥에 가두거나 여전히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므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 그냥 따뜻하게 안아 주시면서 죄로 인해 생긴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회개하면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어진다.
회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축복은, 신분이 죄인에서 아들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조아렸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절). 그렇지만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주었다(22절).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돌아온 아들은 이로써 외형적으로나 신분상으로 온전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이러한 축복은 사도 요한의 기록에도 똑같이 약속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회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축복은,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3-24절). 천국 잔치는 두 가지 점에서 앞서 거지였던 아들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첫째, 거지였을 때는 굶주려 죽을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다. 둘째, 거지였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소외와 수치라는 고통을 주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천국 잔치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놓치더라도, 심지어는 우리의 목숨까지 잃을지라도, 천국 잔치만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잔치는 영원토록 계속되므로 더더욱 놓쳐서는 안 된다.
4. 하늘 가족의 회복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그의 회개와 그로 인해 주어진 축복에 대하여,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기쁨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셨고, 동시에 우리에게 그 아들처럼 회개로 반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 ‘하늘 가족’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
잔치가 벌어졌을 때 한 번 더 눈여겨볼 장면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이다(24절).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 가족의 의미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는 바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회개한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고, 그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는 곳이다. 동시에 그런 일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곳도 교회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디모데에게 한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지고 있다. 복음을 전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야 할 그 기쁨과 즐거움은 금방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의 소멸은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그림이 아니다. 그분이 보기 원하시는 그림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교회 안에 차고 넘치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은 화폭 위에 붓을 터치하는 작업 없이 완성될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도 그것이 상상 속에 머물러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주님은 우리가 붓을 들어 터치하기를 원하시고, 터치하였을 때 그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럴 때 그 그림은 우리와 교회, 그리고 주님께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그 그림이 붓을 터치하는 우리의 손길을 통하여 우리와 우리 교회에 차고 넘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