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8
1. 노아 때의 사람들
‘인자의 때’는 인자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말한다.
누가복음 17장은 그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때 사람들이 노아나 롯의 때처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먼저 노아의 때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27절).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지금의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다. 그들의 이런 일상은 평화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 당시를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는 곳이 창세기 6장이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1-3절).
그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았고, 또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아닌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선택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평가하셨다.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영이신 하나님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결과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쫓으며 살았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어떤 상황에까지 이르게 될까? 온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께 한탄과 근심거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심판을 결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5-7절).
2. 롯 때의 사람들
롯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롯 때는 노아 때보다 경제·문화적으로 조금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28절). 앞선 노아 때에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즉 생존과 생육에 집중한 반면, 롯 때에는 이에 더하여 매매, 경작, 건축 등의 경제 활동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경제가 발달하면 사회 조직이나 문화 등도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한 결과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도 개선되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8장에는 소돔에 의인이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고 소개되고 있다(32절).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수많은 사람은 하나같이 죄 가운데 살았다. 그래서 같은 장에서 소돔의 실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20절). 새번역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너무도 큰 죄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였으면 울부짖는 소리가 그토록 크게 들렸을까.
더구나 소돔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죄질이 이전 사람들보다 더욱 악하였다. 두 명의 천사가 심판하기 위하여 성으로 들어간 후 롯의 집에서 먹고 잠을 청하려고 할 때, 그곳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쌌다. 그들은 롯을 협박하여 천사들을 밖으로 끌어내서 상관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두 천사가 잘생긴 남자들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과 동성애를, 그것도 집단 강간을 하려고 하였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기록하고 있는 곳은 여기가(창세기 19장)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과학의 발달로 경제나 문화 등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죄 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발전할수록 죄악도 그에 따라 더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과학과 물질문명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 노아나 롯 당시의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와서 그 발전상을 보면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지 않을까. 동시에 그들이 현대 사회에 만연된 죄악의 양과 질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현대와 비교할 때 자신들이 지었던 죄는 ‘새 발의 피’라고 생각할 것이 빤하다. 바로 이런 모습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사람들의 일상 모습이다. 주님은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다.
3. 데려감과 버려둠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므로 그분의 재판도 언제나 공정하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을 그분의 나라로 영접하시지만, 악하고 불의한 사람, 즉 죄인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히 9:27). 그래서 노아 당시 사람들은 홍수로, 롯의 때에는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재림하시면 노아나 롯 때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똑같이 심판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우리의 소원은 당연히 데려감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은 그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33절).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노아나 롯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 짓는 사람’을 가리킨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반대로 ‘잃는 자’는 그렇게 애쓰는 것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을 의지하므로 그것들을 잡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흔쾌히 버려서 그것들을 잃는 쪽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마 6:33), 그 이후에도 책임지고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신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잃게 되지만 동시에 목숨은 살게 되는 것이다. 즉 영생을 얻고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덫 안에 놓인 사과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는 원숭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계속 잡고 있다가는 결국에 잡혀 죽게 된다. 탐욕이라고 하는 과일을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면, 비로소 덫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이 보장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주님도 재림의 때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31-32절). 왜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살림살이를 건지기 위하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하는가? 왜 밭에 있는 자는 그 밭에 있는 소출을 얻기 위하여 뒤로 돌이키지 말아야 하는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번개가 하늘에서 비치는 것처럼 급박히 임할 것이다. 그런 순간에 살림살이와 소출을 건지려고 애쓰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므로,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롯의 아내가 그렇게 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즉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아 소돔 성 사람들처럼 심판을 받았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소유한 소출이나 살림살이는, 원숭이를 잡기 위하여 덫 안에 놓여 있는 사과처럼,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될 수 있다. 그것을 누가 그곳에 갖다 놓았을까? 당연히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사탄이다. 그것을 잡기 위하여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의 목숨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사탄을 향해서는 점점 가까워진다. 그 결과 원숭이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홍수와 불로 멸망한 사람들처럼 되고 난다. 우리는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4. 지혜로운 사람
우리나라 속담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개는 호랑이를 상대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덤벼드는 개가 있다. 그 개가 덩치가 크고 용감하여 덤비는 것이 아니다. 강아지이기 때문에, 그것도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강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노아와 롯의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하룻강아지가 호랑이의 날 선 이빨과 발톱의 무서움을 몰랐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진짜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심판 대신 평안만이 계속될 것으로 믿었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들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었다. 만약에 그들이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인식과 함께 심판의 무서움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죄악들로 얼룩진 일상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신의 재림을 예고하셨다. 그 예고대로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오실 것이다. 다시 오셔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시겠지만, 반대로 악하고 불의한 죄인들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버려둠을 당하지 않고 데려감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애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우리의 소유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집착해야 할 분은 오직 주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 내주셨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주신 주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지 않는다. 직장이나 재물도, 권력이나 높은 지위도, 게임이나 취미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하기 위한 덫에 불과하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주님 한 분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