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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21. 2020

바디매오의 믿음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9


  1. 예수님을 만난 맹인


  누가복음 19장은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 도시이므로, 부지런히 걸어가면 하루에 당도할 수 있는 곳이다. 주님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는데, 그곳에서 생애 반년 정도 남겨진 시점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주님이 그곳으로 향하신 이유는,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 지경과 베레아 지역을 지나는 그 여정에서도, 주님은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어느덧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고, 그곳에서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을 만나셨다.




  그 맹인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였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그러한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분을 불렀다. 주님은 그런 맹인을 외면하시지 않고 그를 가까이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41a절). 주님의 질문에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41b절).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2절). 주님의 말씀에 그는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따랐다(43절).




  본문은 맹인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다.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그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에서 다시 보게 되는 축복과 함께 구원까지 받게 되는 선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축복을 받았던 것일까? 또 어떤 점에서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던 것일까? 그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그 같은 믿음을 소유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불치병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 주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구원(영생)을 선물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면서 그분과 함께할 수 있는 축복까지 더해주기 때문이다.



  2. 대상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하는 믿음


  먼저 그가 가진 믿음은, 그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고백하는 믿음이었다. 그는 주님과 그분을 따르는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36절). 사람들은 그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라고 대답해 주었다(37절). 그러자 맹인은 이렇게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




  사람들과 그의 짤막한 대화 속에서, 둘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두 눈으로 멀쩡히 보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이나 여리고 성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 형편없는 촌구석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그런 촌구석에서 올라온 시골뜨기 정도로 취급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빌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안드레와 베드로가 살았던 벳새다라는 동네 사람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나다나엘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그러자 나다나엘은 그에게 무시하듯 대꾸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나다나엘이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촌놈 취급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달리 그는 그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분을 향하여 ‘다윗의 아들’이라고 외쳤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은, 누가에 따르면 메시아를 의미한다(1:27,31-33). 구약에서는 이새의 뿌리(이새의 아들 다윗)에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예언하고 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11:1,10).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서 나올 것이라 믿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도 자신을 다윗의 뿌리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증언하셨다. “나 예수는...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계 22:16).




  ‘메시아’는 히브리어인데,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하면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그분의 독생자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친히 하나님도 되신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하고 있고(요 1:1,14), 예수님도 자신의 정체를 묻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렇다면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만약 맹인이 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나사렛 촌사람 정도로 알았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그 사람들처럼 ‘촌놈 하나 지나가는구나’라면서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 그분께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시 보게 되는 기쁨과 구원을 얻는 축복도 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칠 수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그 결과 눈이 회복되고 구원까지 받는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당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또 믿고 있는가?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자란 촌부 정도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신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와 같은 신들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가? 우리가 설령 그러한 인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엄연히 역사 속에서 존재하셨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수많은 표적과 말씀으로 증명하고 증언해 주셨다. 그래서 바울도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이런 증언까지 하였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


  우리의 신앙은 신화나 전설처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허구가 아니다. ‘증거’라고 하는 실증 사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주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과 사를 가르는 중대한 갈림길이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목숨을 걸고 도박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맹인처럼 겸손하지만 큰 소리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쳐야 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3. 주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맹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두 번째 특징은, 그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이 지나가시든지 말든지 외면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큰 목소리는 그의 믿음의 크기를 증명하는 표지가 되기도 한다.




  주님은 그렇게 외치고 있던 맹인을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자 이렇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의 대답은 주님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증명하고 있다. 만약 그에게 주님이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확신 있게 자신의 요구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혹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나요?”


  주님이 그의 소원을 몰랐을까? 아니다. 주님은 전지하시므로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시다. 더구나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그의 소원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질문하셨던 것은, 그 질문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더욱 크고 강하게 세워 주실 뿐 아니라,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모델로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이런 믿음을 지금 우리에게서도 보기 원하신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없다면 그 사람처럼 주님을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의 소원을 묻는 말에도 “주님이 그것을 하실 수 있나요?”라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 또 우리의 소원은 무엇일까? 혹시 그 문제와 소원을 해결하지 못한 채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맹인처럼 길가에 앉아 예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구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예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그 소원은 쉽고 간단하게 이룰 수 있다.



  4. 간절하고 끈질긴 믿음


  맹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주님께 끈질기고 간절하게 매달렸다는 것이다. 끈질기고 간절하지 못한 사람은 설령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중도에 낙심하게 된다. 주님을 향한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끈질김이 없는 믿음은 낙심에 빠뜨리기 때문에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주님을 믿되 끈질기게 매달려야 한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고, 그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지나가시던 주님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 주위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조용히 하라는 꾸지람만 날아왔다. 만약 그가 그런 핀잔 앞에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보고 구원받는 축복을 맛보지 못하고 큰 낙심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의의 그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9절). 맹인이 ‘크게 소리 질렀다’라는 말은, 본래 까마귀의 우는 소리에서 유래한 의성어이다. 이것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들의 울부짖음같이 ‘악쓰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끈질기게 외쳤던 그의 목소리에는 이런 처절함까지 들어 있었다.




  믿음의 행위는 기도로 표출된다. 이 사건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과부가 날이면 날마다 그에게 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재판장은 얼마간 과부의 말을 듣지 않다가 나중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지만,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과부가 매일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 불의한 재판장이 과부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이유는, 끈질기게 찾아와 호소하는 그녀로 인하여 괴로웠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판장이 이렇다면, 더더구나 정의롭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울면서 떼쓰는 아이를 이기는 부모 없듯이 하나님도 그런 우리를 이기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끈질기게 울면서 떼를 써야 한다. 과부처럼 매일 찾아가서 하소연하고, 맹인처럼 더욱더 큰 소리로 울부짖어야 한다.



  5. 우리의 믿음


  마가는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였다고 소개하고 있다(막 10;46). 그는 맹인이자 거지였다. 그와 비교할 때 우리는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있고,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눈이 멀고 거지였던 바디매오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디매오처럼 간절한 믿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나를 눈이 먼 사람으로, 거지로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의 눈에는 이런 조건들이 좋고 나쁘다는 기준이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바디매오나 우리는 똑같은 존재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그분 앞에서 그냥 죄인일 뿐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디매오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거지가 되어 구걸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알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디매오보다 더 눈이 먼 자이고,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비참한 거지에 불과하다.




  주님이 이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목적은 자명하다. 바디매오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소원이 헛되이 날아가지 않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는 못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우리의 이웃은 그 모습을 보면서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43-44절).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바로 우리의 모습 속에서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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