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21
1. 비유가 더해진 배경
누가복음 19장에는 ‘열 므나 비유’가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그들’에게 들려주셨다. 여기에서 ‘그들’은 삭개오의 집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머물기 위하여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놀라운 선언을 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 그러자 주님도 그의 선언에 이렇게 구원으로 화답해 주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절). 그때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주님은 열 므나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11절). 첫째, 주님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임박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이를 통하여 앞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자(죄인)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목적을 이루실 때도 임박하였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둘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데 있는 것이라면, 그 ‘잃어버린 자’는 자신들, 곧 로마의 지배로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구원’은 당연히 그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본래 의도와 그것을 아전인수 격으로 받아들인 그들의 생각 사이에는 작지 않은 간격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그 격차를 없애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더하신 것이었다.
2. 종들에게 열 므나를 맡긴 귀인
예수님이 더하여 말씀해 주신 것은 ‘열 므나 비유’였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귀인’은 귀족 출신의 사람, 즉 귀족을 말하는데, 이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비유하고 있다. ‘먼 나라’는 하나님 나라 혹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귀인이 먼 나라(또는 그 나라의 왕)로 간 이유는,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통상적으로 왕위는 왕의 아들이 물려받기 때문에, 귀인은 다름 아닌 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님은 이것을 통하여 천지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과 자신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셨다.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 그곳에 머물지 않고 가져온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들과 주님이 생각하고 있던 시간 사이에는 큰 격차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격차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귀인은 아무런 대책 없이 먼 나라로 가지 않았다. 그곳으로 가서 왕위를 받아 돌아올 때까지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쥐어주며 자신의 가업을 맡겼다. ‘므나’는 100드라크마에 해당하는 금액의 화폐이다. 드라크마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인데,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과 무게가 같으므로, 동일한 화폐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므로, 므나는 노동자의 100일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천만 원이다(1일 임금 십만 원 기준). 귀인은 그 돈을 열 명의 종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것을 밑천 삼아 장사하라고 명하였다. 장사하는 목적은 이윤을 내는 데에 있으므로, 귀인은 자기 종들이 장사라는 활동을 통해 이윤 얻기를 기대하였다.
여기에서 귀인이 종들에게 준 ‘므나’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나 재능을 의미한다. 그리고 ‘장사하라’는 것은 그 은사와 재능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이윤, 즉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주님이 주신 지상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자신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마 28:19-20).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는 그 명령에 따라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동시에 그 일을 잘하기 위하여 먼저 가르침을 받고 지키는 실천적인 삶을 살기도 해야 한다.
3. 백성들의 적대적인 태도와 역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왕위를 받으러 간 귀인의 통치를 받게 될 백성들이 정작 그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귀인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귀인을 미워하였기 때문다. 그래서 그들은 귀인의 뒤로 사자를 보내 먼 나라의 왕에게 이런 의사를 전달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 19:14). 그들은 귀인이 왕위를 이어받고 돌아와서 자신들을 통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반대하였던 백성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예수님을 그와 같이 대하였던 유대인들이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 일에 앞장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외식(위선) 행위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주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주님을 향한 그런 미움은 그분을 죽이려는 음모로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주님만 제거하면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외식(위선)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군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소망이 사라지자 그 소망은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표출되었다.
누가복음 23장에는, 유대인들의 외침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가 한 일은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몇 대 때리고 놓아 주겠다.”(14-16절) 그러자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 질렀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18절). ‘바라바’는 성 중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죄로 옥에 갇힌 자였다. 그들은 그토록 흉악무도한 죄인을 놓아주고, 도리어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없애 달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이 반복하여 지른 소리는 심지어 그분의 십자가형까지 요구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절). 이에 빌라도도 지지 않고 화를 내면서 그들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하였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22절). 그렇지만 그들은 그럴수록 더욱더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소리가 빌라도의 목소리를 이겨 버렸다(23절).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역설적인 분이시다. 그분은 군중들의 외침과 그 외침으로 이루어진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 뒤에 이어진 부활을 통하여 오히려 그 사건을 예수님이 주님(왕)이 되게 하시는 계기로 삼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주님(왕)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주님(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왕위를 이어받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셨고, 또 그 이어받은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다.
4. 돌아온 귀인의 셈과 심판
그렇다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 주님은 종들에게 자신이 맡기신 므나로 장사를 잘하였는지 그 셈을 따지실 것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15절 이하부터 소개되고 있다. 또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님을 믿지 않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내용이 본문 마지막 구절에 제시되어 있다.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27절).
귀인은 왕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그들을 불렀다. 첫 번째 종은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다. 주인은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칭찬한 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라고 축복해 주었다. 두 번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 주인은 그에게도 그의 수고에 맞게 다섯 고을을 차지하는 복을 주었다.
그런데 한 종이 문제였다. 그는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악한 종이라는 꾸중과 동시에 심판을 내렸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22-23절).
그 종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주인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오해와 달리 주인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두는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은행에 맡겨서라도 이자를 찾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대하였던 사람이다. 그 종은 이런 오해로 인해 주인이 장사하라고 맡긴 므나를 주인의 명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수건에 고이 싸 두었다. 그 결과 그는 있는 것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다.
5. 두 가지 교훈
‘열 므나 비유’ 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위를 받아 가져오는 사건이 핵심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심으로써 왕위를 받으러 가셨다. 그리고 그 왕위를 가지고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 주님은 종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얼마나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수행하였는지 사전에 고지하신 셈법에 따라 셈을 하실 것이다. 동시에 주님을 미워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기 위하여 주님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였던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는, 주님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백성들이 주님을 미워한 이유는 그분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면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제 마음대로 살 수 없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한사코 반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주님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잃어버린 자들 속에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미워하고,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죄인이라면, 그런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서운 파국(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두 번째 교훈은, 주님이 맡기신 일을 충성을 다하여 지혜롭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원을 이미 우리에게 모두 주셨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이 있다. 주님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그것으로 장사하도록, 즉 그것을 활용하여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일에 충성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작은 일에 충성한 착한 종이라는 칭찬과 더불어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는 복도 주실 것이다. 만약 그 일에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악한 종이라는 꾸중과 함께 맡겨진 것마저 빼앗기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열 므나 비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그 시점에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오해를 바른 인식으로 바로잡으시기 위하여 더해진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오해 속에서 주님을 자신의 영화를 위하여 이용하려고 하였던 유대인처럼, 우리도 그런 오해와 사리사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분은 단지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목적을 다 이루셨다. 따라서 그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고 그분을 우리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