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22
1. 세 번째 논쟁
누가복음 20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후,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셨다. 주님의 그런 행동은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은 유대 지도자들과 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하는 자들이 내쫓긴 것은 그들의 수입에도 타격을 주었다. 또 자신들이 가르치는 곳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셨기 때문에, 이전에 그런 권한을 행사하던 그들로서는 예수님의 행위를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논쟁하는 과정에서 백성들 앞에서 그분께 참패와 함께 수모까지 당하였다.
그들은 이에 격분하여 주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을 따르고 있는 백성들이 두려워서 그 일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그들의 음모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이번에는 헤롯당원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정탐꾼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아 총독의 치리권과 사법권에 넘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던져진 질문이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옳지 않은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파놓은 함정을 빠져나오심과 동시에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 즉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그들의 문제를 고발하셨다. 이로써 그들은 두 번째 참패와 수모를 당하였다.
본문은 위 두 논쟁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논쟁이다. 이번에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이 난해한 부활 문제를 던짐으로써 시작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이상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였다면, 사두개인들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과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하게 지키고, 로마 당국에 세금 내는 것을 우상 숭배와 반민족 행위로 여겼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구약 성경 가운데 성문법인 모세 오경만 믿었고, 로마에 세금 내는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차이로 인하여 그 둘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님의 활동이 사두개인들에게도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그분을 제거하는 일만큼은 공조 체제를 굳건하게 이루고 있었다.
2. 사두개인들이 던진 질문의 의도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굉장히 난해한 것이었다. 신명기 25장 5절은 ‘형사 취수법’에 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들은 이 규정에 근거하여 예수님께 물었다(28-33절). “장남이 아들 없이 죽고 형수를 취하는 일이 둘째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진행되었다면, 부활 때에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당신은 그 형수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신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주님은 전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하신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주님을 대적하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도 함께 하였다. 그때 주님은 의인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14). 또한, 제자들에게 자신이 친히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두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다. 한번은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후에(9:22), 나머지 한번은 부자 관리에게 어떻게 하면 영생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그 사실을 예고하셨다(18:33). 따라서 주님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시면,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고,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사실뿐만 아니라 이전에 하셨던 모든 말씀도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 결과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도 될 수 없다.
사두개인들은 그 질문을 통해서 바로 이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였고, 그렇다면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낱 거짓말만 하고 다니는 부랑자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부활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을 누르고 자신들이 유대 사회의 유일한 지도층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그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딱 잘라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34-35절).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가 명시되어 있다. 첫째, 저 세상에는 부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둘째, 부활한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부활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36절). 개역개정성경에는 원문에 있는 접속사 ‘가르’(gar)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앞뒤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와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사와 같고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부활한 사람들은 다시 죽을 수 없으므로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할 수 없고, 천사와 같으므로 결혼할 필요도 없다.
부활한 사람들이 이루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왜 결혼이 필요 없을까? 결혼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출산을 통하여 종족을 보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부활한 사람들이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통해 종족을 보존할 필요가 없다. 이는 마치 천사들의 숫자가 창세 때부터 그 자체로 충만히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부활한 사람들의 숫자도 그 수효를 보충할 필요 없이 이미 충만한 수를 이루고 있으므로 결혼이나 출산 같은 일도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사실과 이유에 이어서 부활의 근거까지 제시해 주셨는데, 앞서 사두개인들이 제시한 것과 동일하게 모세의 글을 인용하셨다. 욥기(19:26), 시편(16:9-11), 이사야서(26:19), 다니엘서(12:2) 등에서도 부활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만, 성문법인 모세 오경만 믿고 있던 사두개인들을 위해 출애굽기(3:6)를 인용하셨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37-38절).
예수님이 출애굽기 본문을 들어 당시 이미 죽은 자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름을 들어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비록 이 땅에서는 죽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만약 그분이 부활이 없는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은 그분의 정체성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곳에서 그분의 통치도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또 그분을 믿거나 이 땅에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이유도 사라져 버린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이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은 부활 사상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아무것도 감히 더이상 물을 수 없었다.
부활 논쟁 끝에 재미있는 모습이 하나 소개되고 있다.
주님이 완승하시자 서기관들이 보인 반응이 그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잘 말씀하셨다”라고 하는 칭찬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복사(필사)하거나 연구하여 가르치는 전문 율법학자들인데, 주로 레위 지파에서 배출하고 세습되었다. 그들은 왕정 시대에 국가의 중요 문서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왕하 22:3), 왕의 비서(삼하 8:15;왕하 12:10), 공증인(렘 32:8-12), 성전 창고지기(대하 24:11), 징병관(왕하 25:19;대하 26:11)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포로기 이후에는 율법을 기록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하였고, 신약 시대에는 율법 교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바리새파에 속하였다. 서기관들은 앙숙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망신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쌓였던 체증이 해소되는 기쁨을 만끽하였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서기관들의 이런 행동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모습에 더하여 그들의 외식(위선)을 비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그런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4.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사두개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는, 바로 그들처럼 부활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현실주의자였던 그들과 비슷하다. 현대인들도 기술 과학의 발달과 물질문명의 팽배로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과 달리 부활은 실제로 존재한다. 하나님이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 근거가 된다. 또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사도 바울은 그 사건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행 17;31).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그 증거에 기초해서 사실로 믿어야 한다.
두 번째 의미는, 부활이 실제 존재하므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하게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눅 19:35). 부활하지 못하면 죽은 자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만은 피해야 한다. 우리가 수고하여 세상 모든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부활의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경고하셨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50).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다’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요 1;12).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 부활의 자녀가 될 수 있다(눅 19:36).
세 번째 의미는,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였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였다는 말이다. 그분이 주인이시면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종’의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데 있지 않다. 종의 정체성은 그 초점이 온전히 주인에게 맞추어져 있다. 주인을 위하여 주인의 뜻(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 정상적인 종의 모습이다.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다’라는 말은 이렇게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종의 태도를 요구하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굴욕감을 주시기 위한 데 있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종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나의 친구’라고 부르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벧전 2:9a).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종의 태도를 요구하신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에게 풍성한 삶,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종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될 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금방 마르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버린다(요 15:6). 하지만 포도나무에 굳게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고, 그 결과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요 15:5,7).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종의 태도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37절 말씀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자.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여기서 ‘칭하다’라는 단어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모세가 ‘아직도 말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 논쟁하고 있을 때에도 모세는 아직도 그들에게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시간에도 모세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라고.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난 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라고.
따라서 앞서 제시한 부활의 의미는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부활함에 합당히 여김을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