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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22. 2020

놀랍고 위대한, 삭개오의 선언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20


  1. 바디매오와 삭개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디매오의 믿음이 소개되고 있다.

  그에 이어 19장은 세리장 삭개오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공간적인 배경이 모두 여리고이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입성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생애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여리고에서 하룻길밖에 되지 않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후에,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 바디매오와 삭개오는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처한 신체적, 경제적 상이점 등으로 인해 그 믿음이 나타나는 양상도 차이를 보인다. 본문은 삭개오가 주님을 어떻게 만났고, 또 주님을 만난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소개하고 있다.



  2. 포기하지 않는 믿음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도 있었다. 그는 세리장(세무서장)이었고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뚫고 맨 앞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 그분을 보기 위하여 밀치고 있는 상황은, 그에게 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룬 장벽에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 장벽은 오히려 그분을 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더욱 불태웠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의 동선을 예측한 후에 앞으로 달려가서 재빠르게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돌무화과나무’는 무화과와 뽕나무가 합성된 말로, ‘무화과뽕나무’를 말한다. 무화과와 비슷한 열매가 맺히는 ‘뽕나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행위는, 주님을 향하여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믿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는 키가 작은 그의 약점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 주었다.




  삭개오의 이런 믿음은 바디매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18:38-41). 소경 바디매오는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분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앞서가던 자들이 그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핀잔에 주눅 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3. 영접하는 믿음


  간절함이 배어 있는 끈질김은 예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이 있다. 그래서 주님은 가시던 길에 머물러서 그를 데려오라 명하셨다. 주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셨던 것이다. 마디매오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삭개오를, 주님이 어떻게 외면하실 수 있겠는가. 주님은 바로 그러한 믿음을 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은 삭개오가 올라가 있던 돌무화과나무에 이르러 그 위를 쳐다보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그러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6절).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영접으로 반응함으로써 그의 두 번째 믿음을 그분께 보여드렸다.




  믿음은 ‘영접’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요 1:12). 그런가 하면 그는 영접의 개념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실 때, 즉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영접이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먹고 우리도 그분과 더불어 먹게 되는 것이다. 삭개오는 그렇게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 결과 자기 집에서 주님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축복된 시간이 주어졌다.




  영접이 이렇게 쉽고 단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이 쉽고 단순한 것을 외면한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말씀과 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였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롬 1:28a).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마음껏 죄를 지으면서 그것이 안겨 주는 쾌락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보다 좋아하기 때문에, 인생의 주도권(주재권)을 그분에게 넘겨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넘겨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싫어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달려들기까지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우매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잠 1:7). 또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붙잡아 주시지 않고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다(롬 1:28b).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심판은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이어진다. 그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지옥 불 가운데 그냥 내버려 두신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야 하고, 그분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한다. 삭개오가 보여 준 두 번째 믿음은, 우리에게 그와 같이 반응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즉 삭개오처럼 급히 내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라고.



  4. 행위로 보여 주는 믿음


  주님이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자 뭇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눅 19:7).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난하고 있을 때, 그들의 비난과는 정반대로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서서 놀라운 선언을 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 삭개오는 소유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런 결정이 쉬워 보이지만, 의외로 쉽지 않은 일이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사건 이전에, 어떤 부자 관리가 주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율법을 모두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던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렇지만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18:22-23).


  부자 관리의 ‘심한 근심’은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영생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도 포기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어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8:25). 삭개오는 그 어려운 일을 너무도 쉽게 해 버렸다.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만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에 더하여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하였다. 성경은 속이거나 부당하게 빼앗아서 얻은 것들에 대해서 그것의 1/5, 즉 20%를 더하여 갚을 것을 정하고 있다(레 6:5;민 5:6-7), 하지만 삭개오는 성경 규정보다 많은 네 배까지 갚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죄)에 대한 인정과 함께 그 대가까지 넘치도록 지불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 속에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는 진정성이 들어 있다.




  삭개오의 선언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세 번째 모습을 보여 준다. 삭개오는 행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은 입술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삭개오처럼 행하지 않는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



  5. 삭개오의 선언이 놀랍고 위대한 이유


  우리는 삭개오의 선언을 단순하게 자선이나 대가 지불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선언에는 ‘율법의 완성’과 ‘영생’이라고 하는 놀라운 주제가 들어 있다.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 속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다.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눅 9:48).


  가난한 이웃에게 재물을 나누어서 돕는 일은 어린아이를 돕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웃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일은, 주님과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또한 그 안에는 예수님과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나누어 주었던 삭개오의 행위에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계명은, 모든 계명의 첫째와 둘째가 되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 22:37-40). 따라서, 삭개오의 선언에는 바로 ‘율법의 완성’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그의 선언에는 이미 영생이 주어지고 있다. 앞서 예수님이 부자 관리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렇게 할 때 하늘에서 그에게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또한, 그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시면서 그 비유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16:9).




  삭개오의 놀라운 선언이 왜 위대한지 아는가? 사복음서 어디에도 이와 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수많은 말씀으로 교훈하셨지만, 삭개오처럼 실제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모습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신 이후에, 즉 사도행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행 2:44-45;4:32-35).


  더구나 그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처럼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범한 유대인도 아니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도 아니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그래서 로마의 앞잡이라고 손가락질당하던 사람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정한 방법도 취하지 않았다. 속이고 빼앗는 행위를 저지른 죄인에 불과하였다. 그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되어 그런 놀라운 선언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선언이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주님을 만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삭개오가 그 증인이고, 또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그 증인이다.



  6. 잃어버린 자에서 구원받는 자로


  삭개오는 ‘인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다. 그는 주님이 속히 내려오라고 부르실 때, 그분의 말씀대로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그는 주님 앞에서 이런 믿음으로 반응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믿음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모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만일 사람들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믿음을 행위로 증명하였다.


  이런 그의 믿음에 예수님은 구원으로 화답해 주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그리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그렇다면 ‘잃어버린 자’는 누구일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삭개오를 가리킨다. 변화되기 전의 삭개오처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사람이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웃을 속이고 빼앗는 일로 부를 쌓은 사람이다. 삭개오와 같은 선언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죄인’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기 전의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자들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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