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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26. 2020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24


  1.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날이 밝았다.

  날이 밝았지만, 주님 앞에는 여전히 짙은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열두 제자와 함께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주님은, 감람산 기슭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무리에게 체포되셨고,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집으로 끌려가셨다. 그 집 뜰에서 주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희롱하면서 마구 때렸고, 그 외에도 많은 욕으로 그분에게 모욕을 주었다.


  요즘에는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손을 댄 사람을 맞추는 놀이를 거의 하지 않는데, 저자가 어렸을 때, 그리고 대학생 때까지 그 놀이는 동네나 MT 등과 같은 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즐겼던 놀이이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 놀이를 즐겨 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그분의 눈을 가리고 손을 댄 정도가 아니라 마구 때리면서 “선지자 노릇을 해 봐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희롱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노리갯감 삼아서 그렇게 밤새 지루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눅 22:63-65).




  구약 성경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에도 기준이 되었다. 그들은 거기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 사고하였고 거기에서 제시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구약 성경의 핵심인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다(레 19:18).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와 억압을 금지하고 있고(출 20:16;레 19:13). 이웃에게 정의를 실행하라고 명하고 있다(렘 7:5).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삼아서 폭력과 희롱과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은 심각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설령 그 사람이 원수라 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출 23:4-5). 심지어 성경은 원수 갚는 것도 금하고 있으므로(레 19:18), 그들의 행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때리고 있던 시점은, 공회와 로마 법정에서 그분의 죄목이 정해지기 전이었다. 아무리 법이 허술한 당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죄를 정하기도 전에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희롱하며 폭행을 가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렇게 부당하게 밤새도록 시달리신 주님 앞에 날이 밝았지만, 그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보다 더 괴로운 공회의 심문이었다.



  2. 공회의 심문과 예수님의 대답


  (1) ‘공회’는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 등으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다.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어 유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처리하였지만, 사형 문제만큼은 로마 총독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부터 심문을 시작하였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눅 22:67). 이 말은 ‘만약 네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무엇에 근거해서 왜 그런지 우리에게 말해 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심문할 때 많은 질문 가운데 제일 먼저 이 질문부터 던졌던 것일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신에 대한 ‘노출’이라 할 수 있다. 그 노출은 공생애 시작에서부터 공회 앞에 서 계실 때까지, 그리고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시기까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이적(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셨다. 주님은 그 노출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친히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셨다. 그 노출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였다. 많은 사람이 노출된 액면 그대로 그분을 믿기도 하였지만, 시큰둥하게 반응을 보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 같은 사람들은 그 노출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적대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는, 주님이 그들을 비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비판하실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불편해졌다. 여러 차례 논쟁도 오갔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였다. 그들은 그 패배 앞에서 시인으로 겸손하게 마음을 추스르는 대신 자신들의 민망함을 감추기 위한 적대 행위로 일관하였다.


  둘째는, 주님의 노출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분의 노출로 백성들의 시선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주님에게로 자꾸만 옮겨져 갔다.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이면 권력도 그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그들뿐 아니라 그들과 결탁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고, 통치자인 왕이나 총독도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주님이 성전에서 행동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백성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 행위를 자신들의 돈과 명예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노출된 주님은 제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은 주님을 제거하기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수차례 올무를 놓았지만, 주님은 그 올무를 쉽게 빠져나가셨고, 그들은 그때마다 그 올무 속에 그분이 아닌 자신들이 갇히는 결과만 맛보았다. 이런 과정 가운데 그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묘수가 ‘신성 모독죄’를 그분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체포한 후에 자신들만의 심문 장소인 공회로 끌어들여 그에 대한 질문, 즉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라는 질문으로부터 심문을 시작한 것이었다.




  ‘신성 모독죄’는 그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만약 주님이 신성 모독죄에 걸리면 그분은 사기꾼이 되어 버리므로, 그분을 메시아로 믿고 있던 백성들은 마음을 되돌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은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들은 그동안 주님에 의해 손상되었던 부와 명예를 다시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주님이 신성 모독죄에 걸리게 되면, 사형 권한이 있는 로마 법정에 그분을 넘길 수도 있다. 주님이 신성을 모독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거짓말하는 분이시고, 그 거짓말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의 통치에 위협을 가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을 로마 법정에 고소할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위협하는 행위는 반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 죄목을 씌워 주님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




  이런 노림수가 들어 있는 그들의 질문, 즉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라는 요구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7-69절). 주님의 말씀 안에는 상호 간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말을 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차피 그들이 믿지 않고 또 믿으려 하지 않으므로 그 말씀이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고 단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이 심문이 공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 따라 꾸며진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다. 따라서 주님의 어떤 변론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빤하였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신들 그들이 그에 대하여 정당하게 대답할 리 만무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정하셨다. 실제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메시아와 관련된 질문을 수차례 받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던 전력이 있다(20:3-8, 41-44).




  서로 간의 관계 단절로 대화가 어렵다고 인식하신 주님은, 그 대신에 이제부터 있을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제부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를 가리키고,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라는 말씀은 대속의 죽음 이후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될 승리의 확증을 뜻한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 자신이 이제부터 천하 만민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그 권능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을 예고하셨다(마 26:64).




  (2) 주님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눅 22:70a). 그들의 질문 속에는 그들이 앞서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 말씀이 그들에게 신성을 모독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질문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간접적인 시인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될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주님이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주님은 그 말씀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 또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도 되신다(5:20-25).



  3. 공회의 반응


  예수님의 대답에 공회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 모두는 신성 모독 발언을 들은 것만으로도 그분을 마땅히 돌로 쳐 죽일 죄인으로 규정하였고, 또 로마 법정에 가져갈 증거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이상 증거를 요구할 필요도 없다고 입을 모아 소리쳤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눅 22:71). 그 결과 그들은 함께 의논한 끝에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여 버렸다(마 27:1-2).




  우리는 공회가 주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잘못한 문제가 무엇일까? 그들은 감정적으로, 비논리적으로만 심문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판결을 내려 버렸다. 공회가 피고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서는 증거에 기초해서 논리적으로 그 모든 과정을 따져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그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만약 그들이 정상적인 이성을 소유하였다면, 그분이 그들에게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을 때 다시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근거)는 뭐지? 증거라도 있어?” 하지만 사복음서 어디에도 그들이 그렇게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심문을 통해 자기를 감정대로, 즉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분을 신성 모독죄로 정죄하여 버렸다.



   4. 우리의 반응


  그렇다면 공회 앞에 서 계신 주님을 보면서, 그들과 달리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감정이 아닌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증거와 논리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신중히 따져보아야 한다.


  공회 앞에 서시기 전까지 주님의 모든 활동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부족함이 하나도 없다. 그분의 말씀들, 그분이 행하신 이적들, 그분이 하신 사랑과 공의의 표현들은 모두,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친히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심지어 공회의 심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은 더욱 결정적인 증거와 논리를 제공해 준다.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그와 같은 자신의 정체를 친히 증명해 보이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




  주님은 공회의 심문을 받으실 때 그 자리가 그들의 음모에 의해 꾸며졌다는 것을, 그래서 공정한 심문과 판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주님의 입만 아프실 것이 빤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두 차례에 걸친 질문에, 두 번의 대답을 하심으로써 굳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대적하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을 변호하시거나 그들을 설득하시기 위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목적은 바로 부활 이후에 다시 만날 제자들과 오늘 이 사건을 나누고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공회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자기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주권적 선포를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그 선포 앞에서 공회원들처럼 반응해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신경질적으로 난리법석을 떠는 대신, 그분의 신성, 즉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주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화목하기 원하시고, 그 화목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우리는 그분의 축복을 받기 원하신다. 주님의 그 간절하신 소원이 우리의 올바른 반응을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은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신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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