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23
1.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성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예고하셨다.
첫 번째는, 성전 파괴, 즉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였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 에워싸이는 것을 볼 때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시면서, 그때가 되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가고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눅 21:20-21). 그들이 도망가야 하는 이유는, 큰 환난과 진노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다(23-24절). 그리고 그 일은 기원후 70년 로마의 침공으로 실제로 이루어졌다.
주님이 두 번째로 예고하신 것은 재림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절). 주님은 그때 하늘과 땅에 있을 징조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25-26절). 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주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예고에 이어서 곧바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일까?
당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 예언은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헤롯 왕이 세운 성전은 견고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그것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파괴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재림은 더더욱 믿기 어려웠다.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징조들은 그들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또 그분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본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간파하고 계셨던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쉽고도 명쾌하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어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무화과나무는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잎을 내는 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이제 조금 있으면 여름이 온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에서도 그것을 자연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재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다. 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징조들을 볼 때, 인자의 재림도 가까이 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은 그때가 되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재림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을 붙잡고 그것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물어봐야 할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들의 삶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방탕하고, 술에 취해 있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 있으면, 그 사람은 그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설령 믿고 있더라도 확고하게 믿지 않고 희미하게 믿는 사람이다.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있다면 무서워서라도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술에 취하는 것’은 ‘방탕함’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퇴폐적이고 안일한 삶을 산다. ‘생활의 염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세상일로 걱정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이는 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하늘의 하나님이 알고 계시므로, 그것을 믿고 걱정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염려 대신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할 뿐이다(마 6:32-33).
만약 우리가 지금 술에 취해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 있다면, 우리 자신에게 먼저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지금 다시 오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있나?” 이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래서 방탕하고 술 취하고 생활의 염려 가운데 있다면, 그날이 덫과 같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여기에서 ‘덫’은 심판을 가리킨다. 그 심판이 예상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임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3. 재림을 믿는 사람들
(1) 그렇다면 예수님의 예언, 즉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는 우리는, 그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첫째,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인해 마음이 둔하여진다.”(34a절) ‘마음이 둔해진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두워진다는 의미이다. 캄캄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분이 보내시는 사인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도둑같이 임하실 주님을 맞이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느 때 마음이 둔해질까? 방탕할 때, 술에 취해 있을 때, 먹고사는 생활 문제로 염려할 때 그렇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
주님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덫’으로 표현하셨다. ‘덫’은 ‘짐승을 꾀어 잡는 기구’이다. 그런 점에서 덫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덫의 첫 번째 성격은, 잡는 데 있다. 짐승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기 위하여 덫을 놓지는 않는다. 짐승을 잡아서 자유를 박탈하고 그 생명을 고기로 먹기 위하여 덫을 놓는다. 그래서 덫에 걸린 짐승은 자유와 함께 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덫의 두 번째 성격은, 짐승을 잡기 위하여 꾀는 데 있다. ‘꾀다’라는 말은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으로 남을 속이거나 부추겨서 자기 생각대로 끄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꾀는 것’의 본질은 거짓말과 충동질이다.
덫이 가진 두 가지 성격, 즉 ‘꾀어 잡는’ 점을 고려할 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 뒤에 그 누군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바로 우리의 생명을 노리기 위하여 덫을 놓는 사탄이다. 베드로는 사탄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은 살가운 벗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적이다. 그래서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다.
만약 우리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 속에 있다면, 우는 사자와 같은 사탄의 눈길에 우리 자신이 포착되어 있고, 그가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생명이 노략질당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주는 유희 속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그런 상황은 착각으로 어두워진 상태이고, 우리의 자유와 생명이 사탄에 의해 노략질당하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한다.
(2)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두 번째 삶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이다(36절). 기도할 때 깨어 있을 수 있고, 깨어 있을 때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할 때 사탄이 쳐 놓은 덫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방탕하거나 술에 취하지 않는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기 때문에, 생활의 염려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기도는 믿음의 방패가 되어, 사탄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엡 6:16).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기도할 때 굳건하게 된다. 또한, 굳건한 믿음은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9).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를 미워하시지만 정직한 자의 기도는 기뻐하시는 분이시다(잠 15:8). 따라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게 하는 능력이 있다(약 5:15). 또 기도는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 때에 장차 올 모든 환난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절). 우리가 기도하되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축제의 자리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이다. 하늘과 땅에 그분이 예고하신 모든 징조가 나타날 때, 주님은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날은 스스로 주의하거나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이지만, 반대로 주님의 재림을 믿고 스스로 조심하면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 속량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축제의 날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자리에 서게 될까? 심판의 자리일까, 아니면 속량이 주어지는 축제의 자리일까?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주님이 주시는 사인에 맞춰서 대비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