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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17. 2020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게하는 17


  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눅 16:19-26).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어떤 부자’이고, 그와 상대되는 이는 ‘나사로’로 거지이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19절).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그 당시 귀족이나 제사장들이 입었던 겉옷과 속옷이다. 그가 이런 옷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돈만 많이 가진 부자가 아니라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꾸미고 날이면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열고 즐겼다.




  그와 비교할 때 ‘나사로’는 거지였다. 게다가 온몸이 종기투성이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잣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굶주린 배를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처참한 상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개들이 와서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그의 상처를 핥았다. 개들이 상처를 핥을 때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또 그 민망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통과 수치를 동시에 맛본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그를 위하여 부자가 음식을 내주거나 돌봐 주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2. 음부로 간 부자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신분의 높거나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죽음이 비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부자도, 거지 나사로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거지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22-23절). 그렇다면 부자는 왜 음부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그가 부자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부자는 모두 지옥으로 가야 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런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가 음부에 떨어진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 말씀을 어긴 죄

  그는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다. 첫 번째 죄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그리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9절).


  가난한 이웃을 돕지 않는 것이 무슨 죄가 되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 법은 그런 행위를 죄로 규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법은 다르다. 가난한 이웃을 돕지 않는 것을 명백하게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2018년 4분기 가계 동향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에 해당하는 저소득층 가구의 4분기 월평균 소득은 124만 원으로, 일 년 전 같은 기간과 비교할 때 18%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는 지난 2003년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이라고 한다. 반면,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고소득층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932만 원으로, 일 년 전보다 10% 이상 늘었다. 따라서 일 년 사이에 소득의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빈부 격차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러한 양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모든 인류가 배를 채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 8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2017년 발표 자료), 지금도 기근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수많은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부조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죄악으로 규정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비유 속에 나오는 ‘어떤 부자’처럼, 음부에 떨어져서 고통을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2) 교만한 죄

  부자가 음부에 떨어진 두 번째 이유는, 그가 교만하였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은 교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부자가 바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였다면, 그토록 호사스러운 옷을 입고 호화로운 잔치에 파묻혀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소한 옷차림에 소박한 식단으로 일관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교만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주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재물을 섬기게 되어 있고, 그 재물은 다시 자기 자신을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지게 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다.




  바리새인들은 왜 주님 앞에서 교만을 떨었을까?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절). 그때 옆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비웃었다. 누가는 비웃고 있던 그들의 반응 앞에 그들의 특징을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14절).


  돈을 좋아하는 그들이 비웃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돈을 좋아하는 습성을 고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절). 주님은 돈을 좋아하는 그들이 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셨다. 주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벧전 5:5). 그래서 교만하였던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3. 올바른 청지기


  돈이나 재물은 그 성격상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죄악이 되기도 하고 또 선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음부에 떨어지고, 제대로 잘만 사용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주님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데 있다.




  다윗은 천지 만물이 모두 주님의 것이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고 고백하였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1-12). 따라서 돈이나 재물은 우리에게 나오지 않았고 우리의 것도 아니다. 그것들 모두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돈과 재물을 주신 이유는,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치장하고 즐기라고 하는 데 있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것은 돈과 재물을 사랑하여 그것을 섬기는 죄를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주님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이용하여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똑같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7-8,20).




  돈과 재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소비에 있지 않다. 거기에는 ‘이웃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올바른 동기 위에서 바르게 사용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부자가 죽음 이후 처했던 상황이 우리의 것이 되어 버린다. 음부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거기에는 끔찍하고 처절한 몸부림이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이 땅에서 나사로처럼 병들고 거지처럼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4. 음부의 고통과 구원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부자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일까?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은 물 한 방울이 자신의 혀에 떨어져 서늘하게 되는 것이다(25절). 물 한 바가지나 물 한 모금도 아니다. 단지 물 한 방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룰 길이 없다.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다.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극한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부자가 받는 ‘고통’은 어원상 고문을 받을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문을 한두 시간만 받아도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거품을 문 채 쓰러진다. 그렇게 몸서리치는 고통이 천년만년 계속된다면 그 얼마나 끔찍할까.




  예수님이 부자와 거지의 삶 이후의 모습을 이렇게 상세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그 지경에 빠지기 전에 빨리 죄 문제를 해결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하지만, 주어진 돈과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도 범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게 된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행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게 반응하기를 소원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참으로 부드럽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음부에 떨어진 부자의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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