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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15. 2020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5


  1. 하객 없는 결혼식장


  고려 말기부터 성장한 유교는,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근간이 되었다. 유교의 도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유교는 관혼상제를 중시한다. ‘관’은 ‘관례’인데, 남자가 성년에 이르면 어른이 된다는 의미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쓰던 의식으로 일종의 성인식이다. 또 ‘혼’은 결혼식, ‘상’은 장례식, ‘제’는 제사 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한 가정에 이 네 가지 의식 중에 하나라도 생기게 되면 준비를 성대하게 하고, 이웃이나 친척도 모두 함께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게 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집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일로 많은 준비를 해 놓고 기다리는데, 초청한 하객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조금 있으면 예식이 시작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신랑 신부는 물론이거니와 그 부모들도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다급한 김에 초청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다른 일이 좀 생겨서 갈 수 없다.”, “못 가서 미안하다, 양해해 달라.” 그러면 결혼식 당사자들은 초청을 거절한 모든 사람에게 분을 낼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15-24절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큰 잔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


  예수님은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식사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수종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수종’은 신체의 조직 간격이나 체강 안에 림프액, 장액 따위가 많이 괴어서 몸이 붓는 병으로, 그 당시는 불치병이었다. 주님은 그를 고쳐 주시면서 안식일에 질병을 고쳐 주는 일이 옳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또 식사 자리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은 그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교훈해 주셨다. 그런가 하면 식사 자리에 사람들을 초청할 때 친인척이나 부자들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주문하시면서 그렇게 할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 그 자리에서 함께 먹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절). 이렇게 말을 한 사람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메시아사상이 들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큰 잔치가 벌어지는데, 그 잔치는 죄인이나 이방인이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참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유대인일 뿐 아니라 앞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도 잘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에게 ‘큰 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다. 동일 내용을 소개한 마태복음(22:1-10)은 ‘어떤 사람’이 ‘임금’이고, 그 잔치가 ‘혼인 잔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잔치를 마련한 사람은 잔치를 시작할 시간이 되자 초청한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어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모두 하나같이 사양하였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므로 나가 보아야 한다면서 양해를 구하였다.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므로 시험하러 가야 한다면서 초청을 거절하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아내와 결혼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전하였다. 두 사람은 ‘밭’과 ‘소’라고 하는 세상일과 세상 물질에 집착하느라 초청을 거절하였고, 한 사람은 아내와 함께 신혼 재미를 맛보는 것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에 초청을 거절해 버렸다.




  새로 산 밭과 소들을 돌아보는 일은 나쁜 것이 아니다. 또 새신랑이 신부와 함께하는 것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들이 초청 약속을 깨버렸다는 데에 있다. 사실 그들 모두는 큰 잔치에 두 번이나 초청받았다. 이렇게 두 번 초청하는 것은 당시 유대 관습이었는데, 첫 번째는 예약을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첫 번째 초청에 가겠다고 약속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주가 어떻게 당일에 닥쳐서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보낼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결례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사전에 약속한 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이야기의 핵심 문제이다.


  마태는 그들의 불참 이유에 대해 좀 더 적나라하고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기를 싫어하였다’(3절), ‘돌아보지도 않았다’(5절). 그들 모두 그 자리에 가기 싫었기 때문에 돌아보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심지어 적대감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6절).




  그들의 이런 태도에 잔치를 마련한 사람은 ‘노하였다’(눅 14:21). ‘진노’는 화를 내면서 분하고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그는 그들을 버려두고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 자리를 채웠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절). 마태는 잔치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맞이한 결과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



  3.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그렇다면 반대로 ‘큰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잔치의 주인은 종에게 명령을 내려 빨리 성안에 있는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시켰다(눅 14:21).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하였지만, 여전히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러자 주인은 이번에는 성 밖에 있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였다(23절). 결국,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소외당한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 그리고 이방인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그들이 많은 죄 때문에 그런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물론 이방인들도 죄인 취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긍휼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비교할 때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밭과 소를 소유한 부유한 자들이고 신혼 재미에 흠뻑 빠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나 이방인들과 달리 죄가 덜하거나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배척한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부유하고 세상 재미에 빠져 있던 자들과 달리, 가난하고 병이 든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천국 잔치에 들어가 그 맛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가장 부합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4.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 죄인일까, 의인일까? 성경은 우리 모두를 하나같이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따라서 우리 모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은, 그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성경은 회개가 죄 사함을 받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눅 24:47), 또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약속하고 있다(요 1:12).




  우리는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처럼 죄가 없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한번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이 있었다. 그때 두어 사람이 주님께 와서 그 일을 알렸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2-3). 예수님의 대답 속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 들어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들은 가난과 질병이 죄를 더 많이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좀 더 나아가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불의의 재난도 그들이 더욱 많은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죄를 동일시하셨고, 따라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조금밖에 없다고, 또는 죄가 없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들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는, 천국 잔치에서 함께 먹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은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어보라. 그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모습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르심에 문을 활짝 열고 그분과 함께 먹지 못할 이유가 그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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