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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Dec 10. 2020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산책의 시간 / 의사 누가와 함께하는 12


  1.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이유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적(기적)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무리가 모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눅 11:29-32). 여기에서 ‘표적을 요구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예수님께 그것을 요청하였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마태복음 16장 앞에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본 무리는 놀랍게 여기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가 하면 그 일로 모인 수많은 사람을 칠병이어로 배불리 먹이기도 하셨다. 마태는 그렇게 배불리 먹은 사람들의 숫자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나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바로 그 일 이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하였다(마 16:1).




   그렇다면 그들이 그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비록 그분이 촌구석 갈릴리 출신이고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지만 그래도 범상치 않은 언행을 보고 들으면서, 그분의 정체가 정말 궁금해서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혹시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그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단지 예수님을 시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만약 그 시험에 걸려들면 그것을 빌미 삼아 그분을 잡아 들이기 위해서 그분께 표적 보여 주시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께 표적을 구하기 바로 전에 그분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신 일과 칠병이어의 표적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그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유대인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이 성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그 무리가 이렇게 수군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들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요 7:31-32). 그런가 하면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이런 걱정까지 하였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요 11:47).


  이렇게 주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로 믿지 않았다.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이런 마음이 이어지는 걱정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절).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정치적 이익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서 제거하기 위하여 표적을 요청한 것이었다.



  2. 예수님의 반응


  이런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에 예수님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셨다. 첫 번째로,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날씨를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들의 영적 무지를 질책하셨다(마 16:2-3). 두 번째로, 그들의 영적 무지에 더하여 오직 예수님을 배척하려고만 하는 그들의 악하고 음란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셨다(4절). 그리고 그들을 향해 최종적으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선언하셨다.


  이에 대해 마가는 동일 사건을 다루면서 그분의 반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1)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2)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1-13).




  한사코 자신을 힐난하고 시험하려고만 한 바리새인들의 태도 앞에서, 주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신 후에 그들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셨다. 또 그들에게 지금 당장 표적을 보여줘도 그분의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 빤하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그곳에서 그들이 원하던 표적을 보여 주지 않기로 마음먹으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불순한 의도에 지금 당장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장단을 맞추면서 놀아나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분이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계획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자신이 계획하신 때에 자신이 계획하신 가장 선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다. 요나의 표적에 대한 주님의 예고는, 종교 지도자들이 원하던 때와 장소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표적을 예고만 하셨을 뿐, 정작 실행은 주님이 계획하고 계시던 그때와 그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예수님은 지상의 공생애 사역 끝자락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대속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롬 4:25).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달라고 떼를 쓰는 대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주시도록 기도하고 요청해야 한다.



  3. 요나의 표적인 예수님의 부활


  그렇다면 왜 주님은 보여 주실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을까? 다시 말해서, 이전에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그분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결정적인 표적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아레오바고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물론 주님이 부활하시기 전에 행하셨던 모든 표적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 주님은 부활 이전에도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표적들을 여러 차례 보여 주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과 38년 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고,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고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다(이상은 요한이 제시한 표적들). 이것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는 명백한 표적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까지 여전히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그날 밤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이런 질문까지 하였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그 질문에 주님은 기가 막히셨고,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한탄이 섞여 있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믿음을 돕기 위하여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니시면 결코 하실 수 없는 일들을 그 능력으로 이미 다 보여 주셨다고 그들에게 항변 아닌 항변을 하셨다.




  그 대화 이후에도 제자들이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었다는 기록이 사복음서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다시 말해서 부활을 통하여 요나의 표적을 보여 주셨을 때, 제자들은 그때에야 비로소 주님이 이전에 예고하신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이 하셨던 말씀을 믿을 수 있었고(요 2:22), 또 그때 비로소 그분을 자신들의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요 20:28). 이런 이유로, 주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결정적인 표적으로 요나의 표적, 즉 부활의 표적을 그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부활의 표적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 더이상 논쟁을 벌이지 않고 함구하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고, 또 그것이 인간의 최종 숙제이자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주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승리하셨다는 결정적인 표적이고, 또한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분의 십자가가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주신 것이라면, 그분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보여 주신 표적이다(롬 4:25).



  4. 부활의 윤리학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활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마 28:20).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면 우리도 그분처럼 부활하게 되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을 의지하면서 축복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부활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부활을 머나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알고 있던 마르다에게,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죽어 있는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던 그녀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 말씀대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삶에도 생명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주님과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을 믿는다.




  부활이 주는 두 번째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윤리학을 제공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우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렇지만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기 원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삶이 아닌 죽음을 선택할 때도 그 동기는 똑같다.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죽어도 살고 또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에 반대로 행동하는 것은 죄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 그 사람의 기대와 반대로 죽음과 심판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이러한 진리는 ‘생즉필사사즉필생’(生則必死死則必生)이라고 하였던 이순신 장군의 말 속에도 녹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말에 동감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지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버리고 맞는 이치를 따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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