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산책의 시간 12

by 박준택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그분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에는 그러한 표적들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혹은 여덟) 개의 표적만 골라 점층적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병든 왕의 신하의 아들과 삼십팔 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그 바다를 잔잔케 하셨다.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까지 하셨다. 그 표적의 끝에서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 모든 표적은 그 행위의 주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증명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증거가 된다(요 20:31). 그분의 정체를 입증할 수 있는 이렇게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눅 11:29;마 12:39).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요나의 표적은 회개와 믿음을 위한 표적으로 가장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무리들,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요나의 표적을 제시하실 때 심판을 예고하심과 동시에 회개와 믿음을 직접적으로 촉구하셨다. 예수님은 다른 표적들을 보이실 때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다.




둘째, 요나의 표적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이유)에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는 물론 축귀, 치유, 전도 등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분의 부활과 부활의 전제가 되는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구나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마 1:21), 요나의 표적은 그 일을 가리키는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이고 유일한 것이었다.




셋째는, 무리들의 동기와 관련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정의하신 무리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였다. 따라서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동기도 악하고 음란하였다. 그들은 믿기 위하여 표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도는 애초에 없었다. 그들은 오직 그분을 시험하는 데에만 매달렸다(마 16:1). 그러한 의도는 만약 예수님이 다른 표적을 보여주시더라도 그것을 믿기 위한 조건이 아닌, 악하고 음란한 데 이용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가능성만 농후하였다. 요나의 표적 이외의 다른 표적들은 무리들의 회개와 믿음보다는 배고픔과 치유라고 하는 자신들의 유익에만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었다. (그들은 실제 그렇게 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무리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의도에 휘둘리실 분이 아니셨다. 그에 비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상징하는 요나의 표적은, 그러한 동기들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서 있었다.




부활이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그렇게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마 28:20).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바로 지금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과 함께하면서 그분을 의지하는 데에 있다. 부활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 알고 있던 마르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지금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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