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11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동쪽에 위치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해발 790미터의 고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해수면보다 250미터나 낮은 여리고까지는 36km 정도 되는데, 그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험하여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그곳에 강도의 출몰이 잦았다고 한다. 강도는 어떤 사람의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한 후에, 그를 그냥 버려두고 가 버렸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그 사람은 그대로 두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는 종교 지도자였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였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레 19:18)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씀을 외면하고 다른 길로 피하여 가 버렸다.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두 번째로 발견한 사람은 레위인이었다. 하지만 그도 앞서 제사장이 한 행동과 똑같이 그를 피하여 가 버렸다. 레위인은 제사장의 일을 도와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민 8:16).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였다(신 33:10). 따라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내용 중에는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레위인은 자신이 가르쳤던 말씀대로 하지 않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여 버렸다.
이번에는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도중에 거기 이르러 그를 발견하였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본 사마리아인의 마음속에 제일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고, 이윽고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를 돌보아 주었다. 자신의 계획(일정)을 변경하면서까지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그대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자신의 소중한 돈과 시간을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을 국어사전에서는 '긍휼'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긍휼'은 하나님의 성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킨다(시 51:1;단 9:18). 사마리아인에게는 사랑에서 비롯된 그 긍휼이 있었던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졌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이웃을 혈연, 지연, 공간 등이 아닌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정의하셨다. 예수님의 새로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그 사랑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교사는 그 질문 바로 앞에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고, 예수님은 역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요일 4:20-21).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믿고 자신의 인생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분을 믿고 영접하여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다(요 1;12). 예수님은 영생과 사랑에 대한 말씀 끝에 이런 주문을 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정의하신 '참된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