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크기
사람은 몸으로 세상과 교류한다. 외부의 자극에 뇌는 어떤 규칙과 틀로 판단하지만 몸은 그냥 느낀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느낀다. 그래서 디자인은 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픈 의자, 자꾸 손에서 떨어지는 물병, 잡기 힘든 손잡이 등은 몸의 크기와 동작을 고려하지 않은 도구들이다.
패션제품은 하루 종일 몸에 밀착돼있고 움직이는 몸에 대응하여 굽어지고 당겨진다. 따라서 패션디자인은 몸과 동작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한다. 예전부터 도구를 설계하기 위한 단위는 몸의 크기를 기준으로 한 치수를 이용했다. 의복 설계에도 몸을 기준으로 한 단위를 아직 사용한다. 현대의 미터법은 소통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사람의 크기를 직관적으로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의복의 제도에 많이 사용되는 인치(inch)는 엄지손가락의 너비에서 유래했다. 이후 엄지손가락 끝에서 첫 번째 관절(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는 부분)까지의 길이가 기준이 되었다. 12인치는 1피트(feet)다. 피트는 발의 크기이고 3피트는 1야드(yard)다. 고대 로마군은 행군할 때 천 걸음마다 말뚝을 박아 거리를 측정했다. 이때, 한 걸음은 오른발과 왼발이 교차되는 걸음으로 우리식으로는 두걸음이 된다. 그래서 1,760야드가 1마일(mile)이 된다. 이것이 마일의 기원이다.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던 자(척, 尺)는 손을 폈을 때의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에서 유래됐다. 자의 한자인 ‘尺’은 손을 펼쳐서 물건을 재는 형상에서 온 상형문자다. 초기에 1자(척)는 18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치(촌, 寸)는 자의 1/10이다. 삼국지에 관우는 키가 9척이라고 한다. 현재 1척의 길이는 33센티미터 정도이니까 관우의 키는 3미터에 가깝다. 그러나 초기 1척의 길이인 18센티미터로 계산하면 관우의 키는 162센티미터가 된다.
도구를 인체의 치수에 맞춰 제작하는 것은 사람의 편리를 위해 당연하다. 주거공간을 설계 할 때도 인체의 크기가 기준이 된다. 사람의 키와 동작의 범위, 사람간의 거리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안정감까지 고려하여 주거공간을 설계한다. 의복은 건축보다 인체와 더욱 밀접하게 사용된다. 의복은 사람이 외부와 접하는 거의 모든 시간에 몸과 접해 있다. 따라서 부위별 둘레, 길이에 잘 맞아야 하고, 움직임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여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고, 전철 손잡이를 잡는 등등 의복은 사람의 모든 활동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별, 연령, 신체조건에 따라 다르게 설계해야 한다. 젊은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조임이나 무게가 나이든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편함 이기도 하다. 인체의 크기에 따라 의복의 전체 형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복을 입고, 벗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단추나 지퍼 슬라이더의 위치, 주머니의 크기와 위치 등 의복을 구성하는 부속에도 사람의 몸을 고려해야 한다. 패션디자이너는 옷을 입는 사람의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의 몸과 동작을 충분히 고려하여 디자인해야 한다.
습관
사람은 습관적으로 행동한다. 습관은 반복적인 경험이 몸에 쌓여 같은 자극에 쉽게 대응하는 메커니즘이다. 습관은 생각하기 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행동으로 의지적인 행동과 구분된다. 또한 습관은 경험으로 얻어진 결과라는 점에서 본능적인 행동과 구별된다. 제품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는 본능적인 행동과 경험에 의한 습관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본능적인 행동은 생존을 위해서 유전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습관이다. 본능적인 습관의 목적은 생존과 유전자의 전달이다. 본능적인 행동 중에는 고소공포증이나 과식 같은 생존을 위한 유전적 형질도 있지만 보호를 위해 몸을 움츠리거나, 밝은 곳을 향하거나,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곳을 따라서 바라보는 사회적인 행동도 있다. 이런 본능적인 행동에 경험적인 습관이 더해져 몸에 켜켜이 쌓여 있다가 외부 자극을 접하면 반응한다. 경험적인 습관은 학습과 보상으로 얻어진 습관이다. 나사나 병마개 등을 조이거나 잠그고 싶을 때 오른쪽으로 돌리는 행동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도구를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얻은 후천적인 습관이다. 자동차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과 차가 오른쪽으로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지만 사람들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자동차가 오른쪽으로 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습관을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은 사용하는 사람을 당황스럽거나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위험하다.
습관을 인식과 행동으로 구별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습관적인 인식은 기억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경험한 형태는 도식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자극에 반응하여 머릿속에 떠오른다. 디자인 용어 중에 스큐어모피즘이 여기에 해당한다. 스큐어모피즘은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앱에 적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스큐어모피즘은 메타포 개념의 일부분이다. 메타포는 희랍어의 ‘초월해서’라는 의미의 'Meta'와 ‘옮기다’를 의미하는 'Pherein'의 조합이다. 사람들은 메타포에 의해 경험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타인과 소통한다. 현대는 UI 디자인이 플랫화 되면서 스큐어모피즘에 대한 선호가 약해졌지만 결국 사람들은 메타포를 이용해 상황을 기억하고 인식하므로 스큐어모피즘은 디자인의 기본 개념으로 계속 사용될 것이다.
습관적인 행동과 관련 있는 디자인 용어에는 어포던스(Perceived Affordance)가 있다. 어포던스는 1977년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이 창안한 개념으로 도구가 제공하는 시각적 단서를 말한다. 해석하면 '지각된 행동유도성'으로 도구의 형태를 보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 요소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을 도구의 사용 목적과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사람들이 고민하지 않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밀면 열리는 비상구의 문은 어포던스를 잘 활용한 대표적인 디자인이다. 누르는 것으로 동작이 시작되는 버튼들과 손을 넣고 당겨서 열수 있는 서랍 손잡이 등 어포던스는 작동하는 모든 도구에 적용된다.
의복은 입고 벗는 과정과 사용하는 시간 동안 사람의 행동과 함께한다. 따라서 습관을 고려해서 디자인하지 않으면 계속 불편하다. 추위를 피하거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동작은 옷을 여미는 동작과 비슷하다. 과거의 옷은 봉제선을 따라 옆선이나 어깨에 여밈이 있는 옷이 많았다. 그런데 현대 의복은 대부분 앞중심에 여밈이 있다. 또 사람은 구멍이 있으면 뭔가 집어넣는 습관이 있다. 소매나 주머니는 손을 넣기 쉬운 크기와 위치에 있어야 한다. 벨트를 매거나 조이는 행위도 습관적인 행위다. 조이기 위해 사용하는 스토퍼도 누르고 당기는 습관적인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운동이나 노동을 할 때 소매와 바지 부리를 걷는 행위는 후천적으로 생긴 의복 착용 습관이다. 운동을 위한 의복을 디자인할 때는 팔을 걷거나 바지 부리를 조일 수 있는 디자인은 운동 욕구를 자극하여 운동 효과를 높인다. 또한 패션디자인은 메타포를 많이 사용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의복은 다양한 활동에 적합하도록 시대적 특성에 따라 발달했다. 이렇게 상징적인 형태의 의복을 사람들은 감정을 결합시켜 기억한다. 따라서 디자인에 이런 형태를 응용하면 그러한 의미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다. 테일러드 재킷 형태를 보면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현대는 테일러드슈트의 활용이 많이 줄었지만 테일러드 재킷의 형태를 디자인에 반영하면 사람들은 포멀한 느낌을 느낀다. 전투복은 가장 강렬한 생존활동에 사용하는 복장이다. 전투를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사람들은 전투복의 형태에서 활동적인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활동적인 느낌을 주고 싶은 디자인에 전투복의 색상과 디테일을 사용한다. 엠블럼은 문장이나 심벌마크의 이미지로 어떤 집단에 소속된 느낌을 준다. 커다란 숫자는 단체 경기를 하는 선수의 이미지가 있다. 숫자가 프린트된 의복은 팀플레이의 의미를 준다. 이외에 많은 습관적인 인식을 디자인에 사용할 수 있다.
패션디자인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의 품위와 편리함이다. 몸에 익숙해진 인식과 행동을 고려한 디자인은 사람들이 품위 있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습관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