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논문은 보통 6개월에서 1년 심사과정을 거친 다음에 여러 번 수정과정을 거쳐서 게재승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쉽게 게재승인이 될 때도 있지만, 이 논문이 심사하는 동안은 내 마음이 그렇게 평탄하진 않았다.
2018년 하반기에 논문을 투고한 이후, 나는 지도교수처럼 우연한 기회로 장교로서 사관학교에서 교수요원으로 복무했다. 석사논문을 쓰고, 학교 밖을 나와서 여러 군데에서 발표할 기회를 잡았었다. 그렇지만 좀처럼 청중들의 반응은 좋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연구한 방정식은 선형방정식이고, 그중에서도 타원형 선형방정식은 꽤나 쉬운 방정식이라는 편견이 있기 때문에 확산변수에 아주 거친 가정을 가지지 않고서는 청중들에게 만만하다는 인상을 준다. 선형방정식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수학 도구가 개발되지 않고서는 비선형방정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기가 어려웠다.
자연의 많은 현상들은 비선형방정식으로 기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운하와 같이 비교적 얕은 물에서 파도가 일렁일 때 각기 다른 방향에서 온 파도가 충돌한 후 다시 분리될 때 그 파도의 고저가 변하지 않는 현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파도를 솔리톤(Soliton)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파도는 부딪치면 에너지 소산이 발생하지만, 얕은 운하에서의 특정 파도는 이런 해를 가질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이런 현상을 잘 기술하는 방정식으로 Korteweg-de Vries 방정식이다. 이 방정식은 처음에는 주목받진 못했지만, 로스 알라모스에서 플라즈마 물리학 실험을 할 때 사용되었던 방정식이었다. 대다수 내가 만난 수학 동료는 비선형방정식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비선형방정식에서 나타나는 여러 재밌는 현상들을 잡아내기 위해 엄청난 계산을 해서 풀어내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던 적이 많다.
그중 같이 주기적으로 학회에서 만나면서, 종종 맥주도 먹고 하던 친구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친구였다. 저런 방정식의 해를 이용해서 유한시간 안에 폭발해를 건설하는 것에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한번 논문을 쓰면 100페이지는 기본으로 가는 지겨운 싸움을 어떻게든 끌어내던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그쪽 분야의 주제로 해외에서도 여러 번 주목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 친구가 좋은 논문을 낼 때마다 축하했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 친구는 세계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친구 외에는 많이 공부하지 않던 분야였고, 혼자 그 주제를 뚫으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내가 속해있던 분야는 한국에서는 다소 많은 사람들이 하는 분야였지만, 내 연구주제는 너무 특수했고, 내가 만들어낸 논법은 특정한 문제에서는 최적의 방법이었지만,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이 위축된 면도 있었다.
사관학교에 3년간 복무하는 동안, 코로나19도 있었고, 학문공동체에서 멀어지다 보니 여러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었다. 가족과 같이 있던 시절에서 벗어나서 대부분을 혼자 있다 보니 많은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가지고 있는 수학문제를 풀려고 시도해도 잘 되진 않았고, 이 협소한 문제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문제를 연구하고 싶었지만,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오고, 설사 문제를 찾았어도 내가 풀 수 있는 문제인지 볼 만한 안목은 없었다. 사관학교에서는 단기복무에서 장기복무로 전환하면 계속 교수요원으로 사관학교에서 생도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수학자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그만큼 수학자로서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리고 내가 군대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생각을 했었다.
K 교수는 잠시 코로나 통제가 풀린 이후 석사학생과 같이 내가 재직하고 있던 사관학교에 방문했었다. 그때 같이 송어회도 먹었던 거 같다. 그간 내가 한 연구결과를 소개했었지만, 그 연구결과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의미 없는 가정에서 시작한 연구라 그만뒀었다. 사관학교에 남아있을 생각까지 해봤다고 하니, K 교수는 "직업적인 면에서는 괜찮을진 몰라도, 네가 만족하면서 살 거 같진 않다."라고 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고, 그 이후부터는 그 생각을 안 했었다.
그때 K 교수는 잠시 눈여겨봤던 논문을 하나 공유했었다. 이 문제는 앞서 석사논문과 더불어 K 교수가 쓴 논문의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내가 그 논문을 조금 살펴보니 빈틈이 많은 논문이었다. 도메인의 가정이 매우 특수했고, 표류항도 너무 특별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한 4개월간 연구한 끝에 그 논문의 빈틈을 메워서 원하는 결과까지 다 만들어냈다. K 교수는 내가 한 건 별로 없으니 내 이름 넣지 말고 혼자 투고하라고 했었다. 한 5개월 심사 거친 후에 보고서를 두 편 받았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실수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그 위기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다시 투고 한 끝에 게재승인을 이틀 만에 받았다. 이게 내가 첫 번째로 내 논문이 학회지에서 인정을 받았었던 결과였다.
이 걸로 한국의 고등과학원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코로나19라 Zoom으로 발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출장허가를 받고 재택에서 줌으로 발표를 했다. 그때 예상치도 못하게 내 영역에서 국내의 최고전문가 중 한 분이 회의에 들어오셨다. D 교수는 한번 대면으로 봤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꽤나 엄한 분이었기에 긴장하면서 발표를 했었다. 내 발표를 마친 후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고, 후에 이메일로 전화로 물어볼 게 있다고 하고 40분간 계속 토론을 했었다. 내가 쓴 논문에 대해 파생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었고, 나는 내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반례도 들면서 그 질문에 답을 했었다.
"정말 이 상황에서 안 되는 게 맞아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라고 D 교수가 또 전화를 했다. 나는 'L2 추정이 안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마침 다음 주에 D 교수는 같은 세미나에서 강연을 했었는데, 세미나 시작 전에 "람다가 매우 크면 어렵지 않은데, 람다가 작거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네요"라고 하면서 언급을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혼자 어떻게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방법이 생각나서 그 교수님이 못한 부분을 같은 날에 바로 해결을 했다. 그러고 나서 D 교수와 한 이메일을 10번 정도 오간 끝에 그 논문을 완성했고 추후에 출판되었다. D 교수가 적절히 질문을 해주었기 때문에 완성이 되었는데, 그분은 자긴 논문 하나만 알려준 거라고 저자에서는 빠지셨다. 옛날에 석사과정에 처음 들어갔을 때 알고 있던 문제였는데 5년 전에 품고 있었던 질문을 해결했던 순간이라 기뻤다. 정말 작은 문제였지만, 5년 전에 붙잡았지만 할 수도 없던 문제를 5년이 지나서야 해결했을 때 쾌감은 남달랐다. 물론 그때 심사과정에서 또 위기가 발생해서 불안을 삼키며 위기를 넘긴 게 있었다.
어떤 문제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 논문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 과정을 거치니, 내가 연구한 게 그렇게 의미가 없던 건 아니구나 싶었다. 친구들도 다른 교수님도 내가 연구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 얼핏 보면 각자 사람들마다 자기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정통해도, 다른 사람들 문제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때 사관학교에서 출판했던 두 논문은 5년이 지난 지금, 꾸준히 인용되기도 하고, 지금도 최다 인용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 주제에 관해서 후속 연구들도 나름 있었는데, 논문심사관으로 여러 번 의뢰받아 심사도 했었다. 미국 땅에서 내 연구결과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 걸 보면, 내 결과는 내가 잘 못 본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를 느꼈다. 더불어서 그때 해결한 논문 두 편 덕분에 2018년에 썼던 석사논문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더 확장을 할 수 있었기에 의미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