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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말실수'가 만든 기적

베를린 장벽 앞에서 아이와 나눈 평화의 이야기

by 은하수반짝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좌, 중앙)과 커리 부어스트(우)

베를린 중앙역 앞 광장에 앉아 커리 부어스트와 카푸치노로 간단한 아침을 때웠다. 지하철 게이트를 찾아 다니는데 젊은 현지인 여성이 도와주고 싶다며 다가왔다. 분주한 역사에서도 방황하는 이방인을 도우려는 그들의 마음새가 선했다. 베를린 사람들의 차가울 것 같은 인상은 이런 순간마다 뒤집혔다.


드디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 문은 상상보다 더 길고, 더 단정했다. 1788년부터 1791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으로 세워진 이 문은, 전쟁으로 지친 시민들에게 이제는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는 상징이었다. 여섯 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그리스 신전인 듯 반듯하게 서 있었고, 양옆으로도 기둥이 이어져 전체 구조는 길쭉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웅장함보다 품위가 있었고, 파리의 개선문이 '승리'를 소리치는 곳이라면, 이 문은 '평화'을 속삭이는 장소였다.


문 위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콰드리가’가 있고, 그 위에 지팡이와 철십자가를 든 여신이 서 있다. 일부는 이 여신을 ‘승리의 여신 니케’로 보지만, 처음 건축된 당시 의도는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였다. 실제로 이 문 위에서 개선식을 가진 독일 군주도 없었고,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이 문에서 개선식을 처음 치른 이는 다름 아닌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니 처음 의도대로 평화의 여신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도 전쟁의 폭풍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보면 수많은 총탄 자국이 기둥마다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병사들이 이 문에 몸을 숨기며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콰드리가와 기둥 사이 공간은 감시 처소 혹은 고문실로 사용되었다.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문 바로 앞에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열려 있으나 지나갈 수 없는 문’이 되었다. 하지만 통일이 된 지금은 ‘분단의 문’에서 다시 ‘평화의 문’이 되었다.


온유는 문의 전경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 이리저리 위치를 옮기며 시도했지만 계속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때 단체 관광객 대표가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활짝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고, 그 미소 안에는 평화가 담겨 있었다. 우린 그 모습을 브란덴부르크 문의 진짜 풍경으로 가슴 속에 담아왔다.

포츠담 광장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포츠담 광장이 보였다. 이곳은 베를린 장벽이 지나가던 곳이어서 냉전 시기에는 황량 자체였지만 지금은 현대 건축물이 즐비한 번화가이다. 횡단보도 앞에 L자 모양의 기다란 장벽이 전시돼 있었다. 생각보다 얇은 두께에 놀랐고, 덕지덕지 붙은 두터운 껌 두께에 다시 놀랐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검문소가 함께 있었던, 살벌했던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나 ‘테러의 토포그래피’로 갔다. 나치 경찰이던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내부 전시관에는 나치의 범죄 기록이 세세하게 전시돼 있었다. 유대인뿐 아니라 히틀러에 반대하는 고문당한 지식인과 예술가, 추방된 이들의 사진과 글로 기록돼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퍼레이드,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독재 체제를 강화하던 장면, 시민들이 베벨 광장에서 책을 불태우던 사진들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모습


“아빠, 사람들은 왜 나치에게 저렇게 열광했을까?”
“1차 세계대전 패전과 경제 대공황이 겹쳐서 빵 한 조각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불안이 커지면 사람들은 강한 지도자에게 쉽게 마음을 줘. 맞고 틀림보다는, 다수가 가는 쪽으로 휩쓸려가기도 해.”
“반대하면 바로 고문을 했으니 무서웠겠다. 일제강점기 때랑 비슷해.”


생각을 말하면 고문과 총이 위협하는 세상은 얼마나 살벌했을까? 여전히 삶은 힘들다. 생존 경쟁과 학업 경쟁 그리고 비교 전쟁이 여전히 우리를 옭아매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 선택의 자유가 있다. 촛불로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에 마음이 떨리는 요즘, 지금의 이 자유와 평화는 더욱도 감사하고 값지다.


야외 전시장에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 당시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장벽은 처음부터 시멘트가 아니었다. 동독인들이 자꾸만 서독으로 탈출하자 동독은 이를 막기 위해 처음에는 철조망을 세웠다. 갈수록 동독과 서독의 경제 격차가 심해지자, 자유를 위해 필사적으로 서독으로 탈출했다. 그럴수록 베를린 장벽도 점차 두껍고 높아졌다. 콘크리트 벽 위엔 둥근 봉이 얹혀 있어 넘기도 어려웠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나치당의 행렬


장벽을 넘는 일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감시탑, 군견, 즉시 사살 명령. 그 벽은 점차 절망의 벽이 되어갔다. 18세 소년 피터 페히터는 장벽을 넘다 총에 맞고, 한 시간 동안 피를 흘리며 도와달라고 소리치다가 숨졌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참혹했다. 그가 쓰러졌던 자리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하지만 독일은 황당한 말실수 덕분에 통일이 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당시 동독 측의 대변인인 귄터 샤보브스키는 휴가 직후 횡설수설한 상태에서 공식 발표석에 앉았고, “즉시 국경을 개방한다”는 말실수를 모호한 설명과 함께 내놓았다. 동독 정부의 의도는 부분적 개방이었지만 설명이 모호했기에 시민들은 곧바로 국경으로 몰려들었고, 장벽은 사실상 무너졌다. 권터 샤보브스키는 동독정권 붕괴의 책임을 지고 잠시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훗날 “그날의 말실수는 은혜로운 실수였다”고 말했다.

권터 샤보브시키의 은혜로운 말실수(좌), 베를린 장벽 붕괴의 현장(중, 우)

하지만 이것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독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 서독의 꾸준한 교류 정책, 국제 정세의 변화, 그리고 독일인들의 뜨거운 열망이 모두 맞물려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무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역사는 예고 없이 문을 열었다.


현재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 분단되어 있다. 남북한 사이에는 거대한 경제 격차가 가로놓여 있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통일을 두고 시선이 갈린다. 그러나 평화와 자유 없이 억압받는 2,650만명의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안위만 생각할 수 없다. 인권이 가볍게 짓밟히는 그 땅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비참하게 죽어간다. 가족의 잘못이 대물림되는 연좌제 속에서, 탈출조차 꿈꿀 수 없는 삶이다. 한 가문의 정권 유지가 한 나라의 존재 이유가 되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배고픔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독일의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을 건네준다. 역사는 언제나 예고 없이 바뀌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베를린 조각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기도했다. 언젠가 우리 한반도도 철조망을 허물고, 판문점을 지나 자유와 평화의 길을 걷기를 말이다. 그리고 횡설수설한 북한 대변인의 말실수를 기대해 본다. 언젠가 평양 브리핑 룸에서도 ‘즉시 개방합니다’라는 말이 실수처럼 흘러나오길, 그래서 그 말이 우연히 평화를 여는 기적이 되기를.


솔직히 당장은 무섭고 두렵지만, 우리 아이들이 오래오래 살아갈 한반도가 언젠가는 분단과 전쟁의 위협 없이 더욱 안전하고 평화로워지길 말이다.

베를린 테러의 포토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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