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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nameisanger Apr 23. 2023

잊고 있었다.

몇백 번이나 곱씹었던 말. 바깥에서 들려오는 욕설에 차라리 귀를 막았던 밤. 다 끝난 일이라고 말해도 계속 몸이 떨려오던 날들에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이걸 소재로 할 거야. 이걸 소재로 반드시 쓸 거야 라고. 증인이 될거야. 내가 아는 것들을 낱낱히, 형태가 어떻게 되었든 좋으니 바깥에 알리겠다고.


그 아이와의 약속을 한참 동안 잊고 있었다.


네가 약속했잖아, 그날들에 약속했잖아, 부엌으로 칼을 가지러 가려는 나를 막았잖아,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참아도 아무 소용없다고 울 때마다 말했었잖아, 아무 소용 없는 게 아니야, 전부 낱낱히, 하나하나 기억해서 문자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으면, 그것만한 복수가 없을 거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해한 아버지만은 내가 무엇을 썼는지, 이것이 진실한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본인이 겪지 않았다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어린아이의 기억은 믿을 수 없다고 냉소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글이 아니니까.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이니까. 그러니까 상관없어, 내 글은 단 한 사람에게만 도달하면 된다고.


누가 읽어주고, 읽히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게는 하나의 약속이 중요했다. 그날들에 겹쳐 맹세했던 것들이 헛되지 않아야만 했다. 


나는 그 아이와의 약속을 지켜나가고 있는 중이다. 도중이긴 하지만,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하나의 성취다. 만약 그때 그 인간을 찔렀더라면, 차라리 끝내고 싶다면서 아래쪽으로 몸을 던졌더라면, 이런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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