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ynameisanger Mar 17. 2024

서울국제마라톤, 최하위권

오늘은 서울국제마라톤이 열렸다. 집 근처로 코스가 돌아서, 아침부터 한참 동안 마라톤 현장을 쳐다봤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목적지를 향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제각각의 전략을 취한 것을 관찰하는 게 재미있었다. 무릎에 테이프를 붙이는 방식도 달랐고, 아예 안 붙인 사람도 많았다. 미국과 한국 국기를 팔에 달고 뛰는 금발의 외국인은 미군인 것 같았다. 기념용으로 나온 듯한 반팔 티셔츠를 입은 사람도 있었고, 이날을 위해 준비한 듯 검은색으로 깔맞춤한 사람도 있었다. 브랜드를 입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선글라스를 낀 사람, 상위권과의 격차를 휴대폰으로 체크하는 사람, 구경꾼을 보고 오히려 박수를 치는 사람, 격려 받으면 화답하는 사람, 무시하는 사람, 쓰레기를 정해진 곳에 버리는 사람, 아무데나 버리는 사람, 배수구 위에 던지는 사람, 뿌리는 물파스를 바르기 위해 멈춰선 사람, 구급차를 기다려 타고 경기를 포기하는 사람. 그중에 씬 스틸러는 스파이더맨 복장으로 얼굴을 전부 가린 채 달리는 사람이었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태도 역시 제각각이었는데 박자감 있게 뛰는 사람도 있었고 어디가 아픈지 아랫배 쪽을 움켜쥐고 힘없이 걷는 사람도 있었다. 보는 자세도 달랐다. 이어폰을 끼고 자신만의 속도를 견지하는 사람, 아래만 보는 사람, 위를 보며 뛰는 사람, 주변 구경꾼들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 등이었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던 중 나는 한 가지 경향성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하위권과 상위권의 차이였다. 상위권의 마라톤 참가자들이 받던 당연한 듯한 함성과 격려는 하위권으로 접어들면서 좀 힘이 빠져 있었다. 구령도 ‘파이팅’보다는 ‘완주하자’가 많아졌다. 물병을 나눠주는 사람,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준비한 사람들 역시 시간이 가면서 지친 건지, 무심해진 건지. 

마라톤 참가자들의 표정도 미묘하게 변했다. 상위권은 격려를 받아도 복잡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하위권이 되면서 마라톤은 체력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문제로 변했다. 어차피 계속해도 순위는 기록하지 못한다. 끝까지 완주할 것이냐, 도중에 포기하고 전철이나 버스로 귀가할 것이냐. 격려는 조롱으로, 구경은 비난을 감수한 눈빛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다채로운 표정들을 구경하는 게 흥미로워서 마지막까지 그들의 행렬을 바라봤다. 

그런데 최하위권이 되자 풍경은 더 달라졌다. 경찰은 최하위권 참가자들에게 ‘인도로 올라가세요’라고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차도에서 당당하게 뛰고 있던 참가자들은 인도로 쫓겨났다. 내겐 그 장면이 좀 황당하게 느껴졌다. 교통 문제도 있고 대회 진행 문제도 얽혀 있긴 할 터다. 시간은 12시가 조금 넘었다. 어쩐지 성적순으로 인권을 보장받던 학창 시절과 같은 원리로 보였다. 뛰어난 사람들, 성실한 사람들, 상위권을 점령한 사람들은 대우받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우받지 못했다. 상위권과 하위권은 분명 같은 거리를 뛰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상위권이 겪은 것은 쏟아지는 격려와, 밝은 미소와 뻥 뚫린 도로였지만 하위권은 달랐다. 격려는 드물어졌고 구경꾼들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심지어 난 먼저 간 참가자가 아무렇게나 던진 바나나 꼭지에 나중에 뒤따라오던 참가자가 넘어질 뻔한 것도 봤다. 같은 시대의 동일한 장소에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삶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씁쓸해서 나는 경찰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들을 지켜봤다. 

그런데 경찰이 인도로 쫓아낸 무리가 최하위가 아니었다. 참가자임이 분명한, 제 이름이 달린 커다란 명찰을 몸에 두른 한 무리가 여전히 뛰는 걸 포기하지 않은 채로, 공식적인 대회 참가 라인에서 100미터는 뒤떨어진 채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로 내쫓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인도에 있었다. 전화박스와 통행하는 사람과 자전거와 버스 정류장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서면서 여전히 골을 쫓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동안이 아닌 것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