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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킴 Nov 01. 2020

나를 닮은 집

집주인의 집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주거 공간 기획 일을 주로 했던 어린 디자이너 시절에 개인 소비자의 아파트 리모델링 일을 맡게 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상사 대신 내가 직접, 고객인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었을 때 일이었다. 개인 소비자와의  일대일 미팅이 처음이어서 좀 긴장해 있었는데 밤새고 준비해 간 디자인 제안서가 못마땅했는지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꼭 지켜내고 싶은 콘셉트가 무엇인지, 집주인의 집에 대한 기준을 묻는 내 질문에 주인아주머니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되묻기 시작했다. 


“콘셉트 따위를 왜 내가 생각해야 하죠?”

“그걸 내가 다 알려주면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뭐예요?”

“그럴 거면 내가 하지 디자이너한테 왜 돈 주고 일을 시키나요?”

“비싸게 잘 만드는 건 누가 못하나요? 돈 많이 들이면 누구나 다 잘할 수 있어요.”  

“싸게 예쁘게 디자인할 수 있어야 훌륭한 디자이너 아닌가요?”

“돈 들여 디자인하는 건데 좀 티 나게 확 바뀌어야 하지 않나요?”

“그냥 알아서 싸고 예쁘게 만들어 주세요!”


지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어린 디자이너에게는 무척 당황스럽고 상처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나는 한동안 개인 소비자 프로젝트는 피해 다니기까지 했었다. 


물론 일부 맞는 말이긴 하다. 디자이너는 공간의 목적에 맞는 디자인 콘셉트를 제안하고 기획하는 일을 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는 클라이언트의 생각을 뛰어넘는 좋은 아이디어와 설루션을 제공하기도 해야 한다. 또 디자인을 기획하는데 돈을 많이 들일 수 있으면 멋진 디자인을 진행하기 수월하겠지만, 싸고 가성비 좋은 디자인을 잘해 내야 좋은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이 일은 20여 년 전 일이지만(그래도 요즘은 옛날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리빙이나 ‘주거생활문화’에 관심도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도 집, 인테리어, 라이프스타일 등은 디자이너의 전유물이고 나와는 상관없으며 심지어 집은 그저 자산의 일부로만 취급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주거 공간은 디자이너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집은 잡지책 속의 사진들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기발하고 엄청난 것도 아니다. 집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집의 주인인 내가 먼저 준비가 필요하다. 어떤 집을 원하는지, 자기가 살 집에 대한 준비된 태도, 삶의 방식과 기본 원칙 등, 그 집에 사는 집주인의 취향과 스타일을 알지 못하면 상상력 넘치는 멋있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 수가 없다. 디자이너의 기준만으로 만들어놓은 아름답고 장식적인 공간은 다른 사람의 삶의 공간 안에서는 그저 공허하고 불필요한 것들이다. 집주인의 주거 공간에서 발견한 크고 작은 삶의 철학과 스타일이 있어야  감동을 주는 창의적이고 훌륭한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주거’ 관련 프로젝트가 생기면 집주인의 취향과 사소한 습관들, 라이프스타일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공간을 사는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와 삶의 태도들이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어 매력적이고 행복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라이프에 스타일을 갖다

도시의 바쁜 현대인들이 찍어 낸 듯 똑같은 아파트 구조의 틀 속에 비슷비슷하게 살면서 자기만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고 표현하며 살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 단위만 봐도 우리나라는 싱글인 경우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아서 서양사람들처럼 초대 문화가 자연스럽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의 집, 주거 공간이 어떤 모습인지 많이 접해보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살림살이와 ‘집 꾸미기’, ‘좋은 가구 고르기’ 같은 것들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배운 적도 없고 엄마나 할머니가 가르쳐준 기억도 없다. 기껏해야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소위 ‘부자들의 집’이나 예능프로에서 연예인의 집을 보여주는 정도가 다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간접 경험해 보는 유일한 기회일 텐데 이 또한 항상 비슷비슷 네모난 아파트 구조의 집안에 다 정해진 듯 비슷한 자리에 위치한 비슷한 가구들로 다양성과 는 거리가 먼 라이프스타일일 뿐이니 본인들의 주거 공간에 대한 취향과 특성, 나만의 생활 습관과 스타일이 어떠한지 전혀 모르거나 아예 생각해 본적 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다. 남 앞에 드러내야 하는 내 패션 아이템이나 옷이랑 차는 좋은 것, 비싼 것이어야 하지만 일부러 초대해서 보여주지 않는 한 남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내 집 안의 침구나 가구, 살림살이 소품들은 그다지 신경을 못쓰게 되는 데다가 남들과 비슷하지 않으면 불편하다고 느끼게 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내가 사는 집’은 남의 집, 다른 아파트들과 같이 비슷한 거실과 가구들, 비슷한 크기의 텔레비전, 비슷한 조명과 비슷한 바닥 소재여야 마음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라이프스타일 lifestyle’이라는 단어가 마케팅 용어로 자주 사용되면서 모든 영역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는데 라이프와 스타일이라는 쉬크하게 들리는 이 합성어는 말하자면 ‘생활 방식’이라는 뜻 정도가 될 것 같다. 평소에 패션의 스타일에는 좋은 안목과 취향을 가지고 있고 유행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자기 주관이 뚜렷했던 사람들도 주거공간 안에서 자신의 ‘생활 방식’이 어떤지, 어떤 스타일의 공간을 좋아하는지 등을 물으면 답을 듣기가 쉽지 않다.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지, 바쁜 일과 중에도 꼭 지키는 나만의 규칙 같은 습관이 있는지 등은 많이들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라이프스타일이란 단어를 들으면, 유명한 텔레비전 CF 중에 아름다운 여배우가 럭셔리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서 천 장고가 높은 거실 창문에서 커튼을 걷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아일랜드가 넓은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뷰가 멋진 창문 앞 러닝머신 위에서 우아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장면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내 라이프에 스타일이 있으려면 그 정도는 우아해 줘야 할 텐데, 실상은 바쁜 아침 알람 소리에 간신히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아침 먹을 시간도 없이 겨우 뛰쳐나오는 출근길 모습이 대부분 도시 직장인들의 아침 풍경이고, 자신의 현실 라이프스타일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또 라이프스타일 따위는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나라 멋쟁이들의 한가로운 얘기쯤으로 생각하고 포기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먼 훗날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 다음에 시간과 여유가 생기면 나도 꼭 나만의 라이프에 스타일을 가져보리라 다짐하지만 삶에의 좋은 취향과 스타일은 돈이 있다고 생기는 게 아니며 어느 날 갑자기 벼락공부로 얻어지는 것도 아님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라이프스타일은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한 시대의 비주얼적 분위기를 의미하기도 하고 현대적이거나 고전적인 특정 양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내 집을 가꾸고 사는 일이나 내 삶의 방식들을 반드시 세상이 정해논 어떤 트렌드나 스타일을 의미하는 단어들로 규정지어야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인식해야 할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은 그런 트렌드 따위에 따라가지 않는, 타협하지 않는 나만의 기준 같은 것이다. 나의 삶을 칭하는 스타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사람들이 정하는 기준과는 무관한 나의 생활 방식이다. 나와 내 삶과 내 공간과의 관계, 내 집과 삶을 채우는 물건들을 관리하는 태도,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나만의 취향과 기준과 같은 것들이 나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정리해야 한다.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단어는 어떤 분위기를 나타내는 명사일 수도 있고 특정 컬러일 수도 있으며 긴 문장의 서정적인 서술어 일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누가 봐도 딱 나다운 스타일은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분위기이다. 

가장 편안하게 ‘나 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다운 어떤 특정 아우라가 있는 스타일이 생긴다. 다른 사람의 공간이 아무리 멋져도 나다운 스타일로 만들고 가꾸어진 내 집만큼 나에게 편하고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럭셔리의 대명사, 패션계의 큰 별인 샤넬의 칼 라거펠트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럭셔리다.’라고 말했다. 라이프스타일은 어떤 정답이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비교 평가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히려 남과 다른 무엇이 있는지, 가장 ‘나 다움’은 어떤 것인지를 찾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갖고 있으며 살아온 환경과 이루고자 하는 꿈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가장 나다운 공간을 발견하는 즐거움

나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습관, 취향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관심을 갖는 일은 집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집을 가꾸고 돌보며 소중히 여김으로써 나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게 되며 나를 닮은 내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내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이미지나 키워드는 무엇인가, 

-취미생활로 즐겨하는 활동은 무엇이며,

-매일 지키고 싶은 루틴 한 일상생활은 어떤 것들인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언제 무엇을 할 때인가,

-휴가나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또는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캠핑이나 여행을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얼마나 자주 하는지,

-주방에서 음식은 얼마나 자주 해 먹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손님 초대는 얼마나 자주 하는가,

-가전제품의 사용 여부와 빈도 (식기세척기, 오븐, 전자레인지, 빨래 건조기 등)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은,

-좋아하는 영화나 책, 음악,

-소중하게 간직하는 물건은,

-집에 대한 생각 (집의 여러 기능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내 인생에서 최대 관심사는,


만약 내가 손님들을 초대해서 요리를 접대하는 일을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주방을 집의 중앙으로 옮기고 다이닝 테이블을 크고 길게 만들어서 거실과 주방의 가운데 놓고 주방 조리대는 아일랜드 스타일로 거실을 바라보게 오픈형 주방으로 만들면 사람들과의 소통을 더 기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퇴근 후 반신욕을 즐기며 주말엔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겨한다면 주방이나 거실 사이즈를 줄이고 욕조가 근사한 욕실을 만들고 서재방이나 거실 공간을 할애해서 취미생활을 위한 아지트를 만들 수도 있다. 음악을 듣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영화감상 같은 취미생활을 즐겨야 한다면 방 하나쯤은 방음벽 패널 등으로 벽체 마감을 해주어도 좋고 실내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면 바닥에 차음재를 써서 헬스클럽처럼 운동을 즐겨도 좋겠다. 캠핑이나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면 현관이나 창고에 캠핑용품이나 캐리어를 쉽게 수납할 수 있게 수납장을 넉넉히 만들어야 한다.  


물론 나는 아직 꿈꾸던 집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쯤 그런 집에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내 공간을 돌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소망하면서 나를 닮은 공간, 내 취향의 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켜 놓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익숙해져 버린 불편한 공간이나,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공간에서 내 몸과 마음을 억지로 맞추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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