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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킴 Nov 01. 2020

주거에도 취향 연습이 필요하다

취향에 대하여

스타일이라는 단어의 울림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뚜렷한 자기만의 콘셉트와 취향과 스타일을 지닌 사람에게는 항상 매력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누구든 각자의 스타일은 있기 마련이지만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적이고 멋스러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 패션을 포함해서 삶에 대하여도, 각자의 자기만의 스타일과 태도를  만들어 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자신만의 스타일은 수백 가지의 개인의 취향이 모여 이루어지는데 고급스럽고 고상한 취향을 갖게 되는 일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분야에 관하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가끔 설명할 수 조차 없는 그저 개인적인 느낌 때문일 때가 많다. 물론 그저 느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오랜 전 경험이나 책 또는 영화, 미술작품이나 여행 등을 통해 학습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렇게 취향은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며 생겨나고 수정되고 견고 해지는 것이며 그래서 선천적이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사람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 일이 일생을 통해 다듬어지는 ‘삶의 철학’ 같은 것이라면 취향이나 콘셉트들은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그때그때 모습을 달리하는 전략이나 전술쯤이 될 것 같다. 스티브 잡스가 어느 날 네모난 아이폰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해도 잡스의 콘셉트와 취향이 모양을 달리 했을 뿐 그의 인생철학이나 디자인의 단순함을 추구하던 그 사람의  스타일이 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인생철학이나 나의 스타일, 삶을 대하는 태도 등이 매일의 나의 작은 선택과 취향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취향’이라는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상한 취향이든 특이한 취향이든 취향이 서로 비슷하고, 아름다움을 기준하는 안목이 닮았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서로 상대방에게 크게 호감을 갖게 할 수도 있는 무척이나 뿌듯하고 유쾌한 경험이 된다. 프랑스 철학가이며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이 쓴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와 사소한 물건에의 취향이 다름을 보고 절망한다.

“클로이의 구두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객관적으로 말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사람이 객관적으로 사랑에 빠졌는가) 구두는 최고의 유행 상품이며 잘 만들어졌으며 깔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두였다. 그녀가 그 구두를 살 때 도대체 무슨 마음이 었을까 를 생각하니 마음이 산란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이 늘 상식적인 생각처럼 유쾌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좋은 유사성과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만큼이나 위협적인 차이와 만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본문 중에서-


사람들은 성격과 외모 이외에도 서로 비슷한 취향 때문에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또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멋있어 보이는 상대의 취향에 반하기도 한다. 때로는 사랑하는 상대의 그다지 쿨하지 못한 취향에 실망하고 상처 받는다. 가끔 처음 만난 상대가 내가 즐겨 찾는 레스토랑을 좋아한다거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나 책을 자기 취향이라고 해서 별 관심 없었던 상대를 다시 보게 되거나 무관심에서 급호감으로 바뀌어본 경험이 있다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상대의 외모나 성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나와 비슷하거나 또는 나와는 다르지만 멋진 취향을 가진 모습에 반해서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때도 있고 음식이나 영화, 음악 등을 고르는 사소하지만 근사한 취향들이 상대방을 존경하게 만들거나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취향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물질적인 것들을 ‘고르고(선택하고)’, ‘사는(구매하는)’ 문제로만 주로 규정이 되다 보니 ‘고급’이나 ‘품질’, ‘비싼 것’ 같은 단어들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가 없어서 물질적인 것들과 ‘돈’ 같은 단어보다 더 저속하고 속물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취향’이라는 것의 속성 중엔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간직한 간사하고 변덕스러운 모습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고 유행이 변하다 보면 취향도 자연스레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경솔하고 가벼운 느낌인 ‘취향’의 속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에까지 뭐 그리 에너지를 쏟으며 힘들고 까다롭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취향 운운하는 것을 심지어 개념 없거나 ‘사치스럽고 허영 가득하고 천박한 어떤 것’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고, 아무 때나 ‘아무거나’를 외치면서 무취 향의 콤플렉스를 털털하고 ‘성격 좋음’으로 포장하려 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기 취향에 대해 지나치게 자부심이 강해서 상대에게 본인의 취향을 강요하거나 취향이란 도구를 남과 자신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을 가르고 평가하는 잣대로 이용하는 무례하고 개념 없는 부류의 사람들도 많다 보니 자기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질 때도 많다. 그래서 한때는 마치 취향이 없는 듯 무심하게 모든 취향을 받아들이며 무엇이든 별로 연연하거나 개의치 않고 유난 떨지 않는 듯한 ‘잡식성 취향’이 힙스터들에게는 쿨함을 상징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취향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취향이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나쁜 취향을 가졌든 좋은 취향을 가졌든, 나도 모르게 나를 표현하고 있고 내가 평가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떤 책과 영화를 즐겨보고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등등 우리는 일상의 수많은 문제에서 취향을 만난다.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산속에 들어가 성직자의 길을 가야겠다면 모를까 보통의 인간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취향의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남의 취향을 대충 따라가거나 취향의 문제에서 도망가려 하지 말고 나만의 좋은 취향을 갖기 위해 노력해 보는 게 어떤가. 나만의 기준과 취향이 없이 평생 ‘아무거나’를 취하고 살아야 하는 삶은 너무 재미없고 끔찍하지 않은가. 


주거에도 취향 연습이 필요하다  

앞서도 말했듯, 좋은 취향은 타고나기보다 길러지는 것, 많은 좋은 경험 들을 통해 학습되는 것이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각이 남다른 사람들도 많이 경험해 본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내가 사는 주거 공간과 살림살이들에 대해서도 좋은 취향을 가지려면 경험과 실패를 많이 해봐야 한다. 실패 없이 어찌 좋은 품질의 물건을 알아보고 자기 취향과 필요를 깨닫겠는가. 물론 패션과는 달리 주거의 영역은 좋은 취향을 연습하기가 더 어려운 게 사실이다. 패션은 어느 정도는 쉽게 소비하고 실수하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지만 주거 공간을 포함한 가구, 리빙 제품의 영역은 패션에 비하면 다양한 경험 자체가 힘들다. 특히 가구나 전자제품 같은 리빙 아이템의 경우는 패션에 비하면 훨씬 고가의 품목들이 많아서 한번 구매하면 망가지기 전까지는 취향이 변해서 바꾸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고 짐이 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실패를 통한 경험으로 ‘취향 연습’을 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요즘은, 클릭 한 번으로 지구 반대편에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어떤 새로운 물건들이 출고됐는지도 금방 알 수 있는 세상이니 내가 사는 공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만 있다면 우리의  취향 연습에 도움을 줄 레퍼런스 reference 들은 꽤 많아진 편이다. 또 불과 몇 년 전에 비하면 제품의 다양성과 유용한 정보들을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 있고 소셜네트위크를 통하면 웬만한 전문가들보다 더 훌륭한 안목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으니 직접 경험이나 소비가 힘들어도 맘만 먹는다면 여러 간접 경험을 통해서 내 취향을 갈고닦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별 관심이 없었더라도 이렇게 내 주거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취향 연습을 시작했다면 공간과 물건들과 나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용감하게 마주하고 생각하기를 시작하면서 소소한 시도들을 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집안 가구의 배치를 직접 바꿔보고 발품 팔고 구경도 많이 다니면서 주거 공간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갖게 된 내 취향은 무엇인지 먼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해 보고, 평소 어떤 공간에서 좀 더 편안함을 느꼈는지, 어떤 의자가 왜 더 좋은지, 어떤 소재의 가구나 페브릭이 기분을 더 좋게 하는지 등, 남들이 말하는 ‘좋은 것’ 보다 내가 무엇을, 왜 더 좋아하는지 하는 취향의 문제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관심과 정보들이 경험으로 쌓이면서 언젠가는 사물에 대한 진정한 필요와 가치를 알아보는 자신만의 뚜렷한 기준이 생기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기준은 더 이상 세상에서 매겨주는 가격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결국 ‘취향’은 ‘나만의 가치 기준’이 있거나 없음의 문제이지, 누군가의 기준으로 좋거나 나쁘거나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취향을 즐기는 삶

조화로운 공간이 인간에게 주는 감성적 만족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 나의 취향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만들어진 공간이 다시 나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며 내 스타일과 내 모습과 나를 만든다. 내 주거 공간과 가구들, 예술 작품이나 조명 기구 등은 물론이고 테이블 위에 무심히 놓인 조잡한 컬러의 수납용 바구니나 탁상용 달력, 거실 공간에 안 어울리는 방석과 쿠션, 실내용 슬리퍼, 아늑한 욕실 분위기를 깨뜨리는 양치컵과 쓰레기통 등, 그 공간에 사는 사람의 취향을 무시한 사소한 물건들, 아주 작은 소품들까지 나도 모르게 나의 정서적 안정감을 파괴하여 조잡하고 우아하지 않은 스타일의 시니컬한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내가 먹고 자고 사는 집, 옷 입는 방법, 좋아하는 물건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있는데, 이런 것들은 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는 나에 대한 정보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사소한 선택들이 모여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거라면 매일의 사소한 선택들에 소박하더라도 나만의 소신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매일의 사사로운 작은 판단과 선택들이 그 날의 날씨에 따라,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 그 시대의 유행에 의해 바뀌어지는 믿음직하지 않고 변덕스러운 것이라 해도 순간순간의 나의 촌스럽고 미숙하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던 취향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 모습과 내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 대충 아무데서나 아무것들에 둘러싸여 살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내가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 취향이 내일 또 그저 그런 별로가 되더라도, 지금 현재를 최선을 다해 즐기는 그 순간 나를 만족시켜준 수많은 내 취향들과 내 스타일이 언젠가의 나에게, 또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한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닌 취향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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