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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변화 Jun 05. 2024

후송(1)

더 나은 전문가

후송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임지는 자운대 지역에 있는 국군대전병원이었다. 자운대라는 이름은 자운동이라는 지명에서 나왔는데 둘의 한자가 조금 다르다. 자운대는 자줏빛 구름(紫雲’)이고 자운동은 스스로 구름(自雲). 

자줏빛 구름의 의미는 4월에 임관을 하고 자운대로 들어서면서 알게 됐다. 위병 초소를 지나 관사 아파트로 향하는 길옆으로 나무들이 쭉 심어져 있는데, 4월이 되면 활짝 핀 자목련들이 (조금 과장하면) 자줏빛 구름처럼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라는 이름이 1992년 이 지역이 군지역이 되면서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아마도 당시에 자목련 나무들을 길가에 심고 나서 자줏빛 구름을 뜻하는 한자를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 생각에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스스로 구름이라는 건 뭘까. 


“최 대위, 뭐하냐?”

외과 나호준이 응급실 당직실 문을 벌컥 열더니 나를 불렀다. 

“뭐야? 조용하구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군병원의 응급의학과 군의관은 한가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신체 검사를 통해 선발된 건강한 이십 대 청년들이 모인 지역에 있는 응급실이 바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웬일이냐?”

“후송 당직 좀 바꿔 줘. 주말에 여친 만나러 가야 돼.”


내가 호준을 처음 본 건 7주의 군사 훈련 기간 중 가장 힘들다는 유격훈련을 막 끝내고 맞이한 첫번째 일요일이었다. 우리 훈육대가 먼저 유격훈련을 받고 돌아왔고 호준은 다음 주 예정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예배가 시작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동그란 양철 쓰레기통을 가운데 두고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호준이 공중으로 연기를 후욱 내뿜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내무반으로 들어와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사이렌이 쫘악 울려 퍼졌어. 1층 강당으로 모이라는 거야. 

-휴전선 근처에서 시작된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사관후보생을 포함한 후방의 군인들도 전방으로 투입돼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부터 지시에 잘 따라 주기 바란다

전투복을 입고 나타난 훈육대장이 비장하게 일장 연설을 했지. 조국이니 희생이니 하면서. 그리곤 정적이 흘렀어. 곧 강당 안이 술렁였어. 훈육장교가 손바닥만한 비닐백을 나눠줬지. 머리카락이랑 손톱을 잘라서 넣어 제출하래. 뭐야 진짜야, 강당 안이 또 한 번 술렁였어. 또 다른 훈육장교는 볼펜이랑 편지지를 나눠 주더니 가족에게 편지를 쓰라는 거야. 강당에 모인 후보생들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기만 했어. 

-내일 새벽 다섯 시에 영천역에서 전방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한다. 열차번호를 불러줄 테니 내일 혼란 없이 일사불란하게 출발할 수 있도록. 

훈육대장이 군번과 타야 할 열차번호를 불러줬어. 그러고 나서 종이를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더라구. 군사기밀이래나 뭐래나. 

그때 내가 헐레벌떡 강당으로 뛰어 들어왔지. 장내 방송이 울려 퍼지는 내내 몰래 연병장에 묻어둔 핸드폰으로 여자 친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거든. 자초지종을 듣고 완전히 패닉에 빠졌지.

훈육장교가 눈을 부라렸어. 전쟁이 터졌는데 정신 못 차린다고 소리를 버럭 질렀어. 

-열차번호를 못 들었습니다. 제발 알려주십시오, 살고 싶습니다. 제발! 

거의 나라 잃은 국민처럼 울었다. 아, 쪽팔려. 

-못 들었습니다. 제발 알려 주십시오..

근데 진짜 웃기는 건 내가 울먹이니까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들도 흐느끼기 시작했다는 거야. 한참 동안 울먹이는 소리와 한숨 소리가 강당 안을 메웠지. 훈육 대장이 군기가 빠졌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뒤 번호를 알려주고 강당 밖으로 나갔어. 종이를 찢어서 버렸는데 걔들이 어떻게 번호를 알았을까. 그때 눈치를 깠어야 했는데, 훈육장교들이 나가고 조금 지나니까 다시 스피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 

생각보다 심각한데요언제 끝내실 겁니까재밌는데 좀 더 두고 보죠이것도 훈련이잖습니까

방송실 마이크가 켜져 있었어. 지들끼리 키득거리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온 거야. 훈육 장교들이 꾸민 쇼였던 거지. 우리가 잔뜩 열받아서 항의했더니 훈련은 종료됐어. 아,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후송 당직은 상급병원으로 후송 갈 환자가 발생하면 동행해야 했다. 주말에 불려 나올 확률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국군대전병원이 후방 군병원 중에서 최상위 병원이어서 웬만해서는 상급의료기관으로 후송 갈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 일요일 점심 즈음에 서울로 헬기 후송 갈 환자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당직실에 도착하니 TV를 보고 있던 진료부장이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고 손을 들어 알은체를 했다. 진료부장이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근처 전투비행단에서 나흘 전에 경막하뇌출혈로 전원 와서 응급수술했는데 아직 코마야. 보호자들이 병원장실 가서 서울로 보내달라고 난리를 쳤나 봐. 깨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부대에서 사고가 난 거니 해달라는 대로 해줘야지 어쩌겠냐.”

진료부장이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서 후송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최대위, 겉옷이랑 지갑도 가져가. 공군 애들은 내려만 주고 가버린다는 얘기가 있어. 대위 따위를 기다려 줄 만큼 기름이 여유가 없다나 어쨌다나.”

11월이어서 밤에는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설마하니 진짜로 휑하니 가겠어. 그도 그럴 것이 혹시나 해서 숙직이었던 의정장교 박중위한테 물어보니 절대 그럴 일 없다면서 자기가 공군부대에 연락을 해놓겠다고 했다.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결국 다시 집으로 가서 외투를 가져오는 건 너무 귀찮았기 때문에 달랑 흰 가운 하나만 걸치고 헬리콥터에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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