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는 어떻게 전문가가 되는가
미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십 년 후의 의료 시장은 이렇게 변할 것이고 응급의학은 저렇게 변할 것이고 등등.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르고 있고 앞으로도 절대로 모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미래도 존재한다. 지금 씨앗을 뿌리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열매가 열릴 거라는 것. 그보다 더 분명한 건 아무것도 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 그건 정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화상병원에 간 건 앞으로 화상이 촉망받는 분야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전히 그렇지 못하다. 선진국이 될수록 화상 환자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배워야 한다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고, 가르쳐줄 스승이 있었고, 성실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응급의학과와 완전히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어서이기도 했다.
의과대학 6년과 인턴을 포함한 전공의 5년, 도합 11년을 배우고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됐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지금도 가끔 후배들에게 국군대전병원 진료부장이 했던 말을 해주곤 한다. 전문의 면허는 운전면허와 같은 것이니 면허를 방금 딴 초보운전자처럼 조심조심 환자를 보라는 것이다. 전문의 면허는 현재 전문가이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받은 것이다.
‘상상’에 등장했던 횡격막 파열 환자를 한 번 떠올려 보자. 한국에서라면 응급의학과에서 초기 처치를 하고 흉부외과나 일반외과로 연결해서 수술을 하겠지만 일본에서는 구급의학에서 초기 처치부터 수술까지 한다. 일본의 의사 양성 시스템이 한국과 전혀 다르기 때문인데, 이 얘기를 몇 년 전 한일학회에서 들었을 때 한국도 응급의학과가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질환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안내를 맡았던 일본 의사는 구급의학 9년차였다. 안과 응급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서 수련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 취직해서 2주 동안 중환자실 병동 외래 수술방에서 해야 일을 배웠다. 관찰 기간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입원환자를 받기 시작한 첫 주에 체표면적 52%의 화상을 입은 이십 대 남자 환자가 입원했다. 내가 받은 첫 번째 중증 화상환자였다.
“소변량이 조금 적은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파클랜드가 언제 끝나지?” 문경준이 아침 식사로 사온 김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오늘 두 시요.”
“좀 더 지켜보고 똑같으면 수액량을 늘려.”
응급의학과와 화상은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했다.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이 화상 역시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증화상 환자의 생존률은 195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좋아졌다.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대량 수액 요법이다. 1930년 언더힐은 화상환자 상처의 물집 안에 있는 액체를 분석해서 혈장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화상환자들의 사망이 독성물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분 손실(loss of fluid)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44년 룬드와 브로더(Lund and Browder)는 화상 체표면적을 쉽게 계산할 수 있는 도표를 제시했다. 지금까지도 화상체표면적을 측정할 때 사용하고 있다. 이후에 화상 체표면적에 따른 수액량을 구하는 여러 방식들이 연구되었고, 1968년 박스터는 ‘파클랜드 공식’이라고 알려진 계산법을 제시한다. 화상환자를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들이 아니더라도 모두 알고 있는 공식이다.
소변줄을 꼽고 중심정맥관을 넣고 드레싱을 하고 거기서 좀 더 나간다면 수액량을 계산해서 주는 것까지. 응급의학과 의사였다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파클랜드 끝나면 수술 계획을 세워.”
내가 경준을 쳐다보았다.
“한 달 동안 상처 절반을 줄이는 게 목표, 내일 수술방 들어가서 깊은 데는 에스카치고 카데바 덮어.”
화상학 교과서 <토탈번케어(total burn care)>에 실린 계산법에 따르면 위의 환자의 사망가능성은 체표면적 52에서 14를 뺀 38(%)이다. 다른 방식으로 평가해도 30퍼센트 정도이다. 열 명 중에 서너 명 정도가 사망하는 것이니 굉장히 높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의 계산법은 나이, 기저질환, 흡입손상을 포함한 다른 동반손상과 상관없이 따진 것이기 때문에 20대이고 다른 기저질환과 동반손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경험적으로는 20퍼센트 이하이다. 반대로 말기신부전인 60대였다면 훨씬 높은 사망률을 보일 것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 모든 건 현대적인 화상치료법을 모두 활용해서 치료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상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은 젖어 있던 땅이 말라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시간이라는 햇빛을 쬐면 편평한 곳은 금세 마르지만 깊은 웅덩이가 있던 곳은 여전히 물이 고여있다. 화상외과의는 그냥 두면 마를 땅과 웅덩이가 너무 깊어서 흙을 부어 메꿔줘야 하는 곳을 구분해야 한다. 드레싱만으로 나을 부위와 피부이식을 해야 할 부위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화상체표면적 50퍼센트를 덮으려면 나머지 50퍼센트에서 피부를 떼야 하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치료를 하지 않는다. 땅을 말리기 위해서 모든 곳에 흙을 덮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의 피부는 땅이 아니기 때문에 통증과 감염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카데바 피부를 이용한 드레싱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한시적이지만(대개 2주 정도 유지한다)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내 환자 역시 카데바피부를 덮고 2주 후에 제거했고 이후에 상처가 삼 분의 일로 줄어든 상태에서 두 차례 피부이식을 시행해서 모두 나았다.
이보다 좀 더 극적인 경우도 있다. 체표면적 92퍼센트의 화상을 입은 30대 여자 환자이다. 이론적으로는 사망률이 78퍼센트이지만 경험적으로 거의 백퍼센트에 가깝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화상을 입은 상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있는 모기를 잡기 위해 모기스프레이를 잔뜩 뿌린 후에 화장실 문을 닫는다. 이후에 변기에 앉아서 담배를 피려고 라이터를 켜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화상을 입는다. 비슷한 경우로 전기모기채로 모기를 잡는 과정에서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황당하지만 여름철에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고이다. 스프레이에 있는 액화석유가스가 미세한 입자로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 라이터나 전기 모기채 스파크에 의해서 불이 붙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런 방식으로 순식간에 입는 화상은 범위는 넓지만 불꽃이 일정 시간 닿아서 생긴 화상에 비해서 얕은 상처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 이식수술 없이도 나을 수 있다는 점이다. 웅덩이가 없는 편평한 땅을 말리는 것과 같다. 내 환자는 카데바 피부를 덮고 2주 후에 상처의 90퍼센트가 나았다. 한 달 즈음 됐을 때 퇴원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므로 매번 해피엔딩만 있는 건 아니다. 체표면적 15퍼센트인 20대 환자가 입원 2주일째 갑자기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폐가 갑작스럽게 망가지면서 사망하기도 하고, 25퍼센트인 70대 환자가 피부이식을 한 지 열흘째 폐색전증으로 인한 심정지로 사망하기도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혀 예상을 못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20대 환자는 얼굴 화상이 심하고 흡입 손상의 가능성이 높았으며, 70대 남자는 흡연력과 고혈압 약을 복용중이었다. 하지만 고위험군임을 알고 있다해도 매번 완벽한 예방법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흡입손상은 화상학 분야에서 아직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고 폐색전증은 한국인과 같은 아시아인들에게 흔하지는 않지만 압박스타킹을 착용함으로써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압박스타킹조차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양쪽 다리를 수술해야 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70대 환자의 경우가 그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