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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신과 여름비

by 생각의 변화

생신과 여름비


장인 어르신의 구순(九旬) 생신이다. 몇 가지 축하할 일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전 해 여름 내내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안 좋았던 폐렴이 좋아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드디어 새 아파트로 입주하게 된 것이다. 덧붙여 한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족 모임을 맘 편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뜻깊었다.

아버님은 체중이 40킬로그램을 간신히 넘을 정도로 작고 깡마른 체구였고, 말수가 적고 조용하신 편이어서 얘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벌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무거운 지게를 지고 다녀서 생겼다는 측만증도,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필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반듯한 글씨체도,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가끔 풀었다는 수학 문제집도 모두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다.

예전에는 모임을 하면 당신께서 근처 수산시장에서 직접 회를 떠 오곤 했지만 더 이상 그러긴 어려웠다. 마침 마트에 들를 일이 있어서 우리가 회를 사 가기로 했다.


식탁에 모인 우리의 대화는 아버님의 입원으로부터 출발해 각자의 노년과 죽음으로 넘어갔다. 아버님은 평소에도 인명은 재천이고 당장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으니 연명치료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히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마도-그런 상황이 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지만- 연명치료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가족들은 당신의 의사를 따랐을 것이다.

내가 언젠가 책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 떠올라 언급한다.

“요양원 식사 시간에는 여기저기서 컥컥하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데, 그게 나이가 들면 경추 커브가 변형돼 자세가 구부정해지면서 사레가 쉽게 들리기 때문이래요.”

“언니도 알약 삼키다가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했잖아?”

아내가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처형에게 물을 건넨다. 처형은 물을 마시고 가슴을 주먹으로 문지르더니 일어나 아내와 함께 화장실로 간다. 잠시 후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당신이 여기로 좀 와봐.”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화장실로 간다. 아내는 처형을 등 뒤에서 안은 채 안간힘을 쓰며 복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미 몇 번 시도했는지 압박이 약하고 처형의 얼굴은 흙빛이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스치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주욱 흘러 내려간다. 아내와 자리를 바꾼다. 등 뒤에서 두 팔로 감싼 채 명치에 왼손 주먹을 올리고 그 위로 오른손바닥을 올려 있는 힘껏 복부를 압박한다. 아무 변화가 없다. 손의 위치를 조정해서 다시 한번. 결과는 마찬가지. 옆에 있는 아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나는 그 짧은 시간에 땀으로 범벅이 된다. 처형이 헛구역질을 해 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세 번째 압박. ‘컥’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입에서 튀어나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화장실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그제서야 처형이 날숨을 길게 내뱉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내가 등을 쓸어주면서 괜찮은지 묻는다. “괜찮아. 고마워.” 처형이 힘없이 말한다.

처형이 거실로 나간 뒤 아내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담즙 색깔의 덩어리를 집어 든다. 소화되다 만 광어회다. 양변기에 떨어뜨리고 물을 내린다. 잠시 후 아내가 뭔가를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점심을 먹고 나니 바깥은 비가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잔뜩 흐리다. 아내의 제안으로 예전에 살던 집을 보러 가기로 한다. 연애 시절 버스에서 내려 함께 비탈길을 걸어 올라 도착했던 이층집. 초록색 철문을 가로질러 양옆의 회색 담벼락을 따라 노란색 출입금지 경고 테잎이 붙어있다. 철문 아래로 높고 폭이 넓은 시멘트 계단이 내려가고 그 끝에 자그마한 정원이 있다. 푸르스름한 수국과 하얀 라일락과 붉은 앵도가 자라던 곳.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며 돌아가야 할까를 물어보려고 아내의 얼굴을 본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눈가에 맺혀있다. 언젠가 아내가 들려준,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님이 빗물을 받기 위해 벽돌색 고무 양동이를 정원 곳곳에 놓았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후두둑. 빗방울이 굵어진다. 여름옷이 조금씩 젖는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와 푸르게 상승하는 식물들과 수평으로 채워지는 양동이 속의 투명한 빗물을,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 꼿꼿이 서서 거세게 쏟아지는 여름비를 맞으며 풀빛으로 무성해지는 아버님을 상상한다. 새삼 모두 무사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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