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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용 Mar 08. 2021

공짜로 원하는 옷, 최신 아이폰 빌려쓰는 사람들

'반품·환불 편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 유통업계

나는 여행 사진광(狂)이다. 머릿속 추억은 증발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떠나면 미친 듯 셔터를 누르는 이유다.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 생활 하면서 우리가 제일 가고 싶어 했던 곳이라 기대가 컸다. 여행 시작 이틀 전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카메라가 고장 난 것이다.


바로 집 근처 가전제품 판매장으로 달려갔다. 카메라 수리를 부탁했다. 점원은 2주 뒤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카메라 없는 여행은 나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점원을 붙들고 최대한 빨리 고칠 방법을 물었다. 간절하고 애절한 눈빛까지 보탰다.


점원은 우리에게 한 가지 절묘한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귀를 쫑긋 세웠다. 점원은 "매장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를 사세요"라고 말했다. '결국, 카메라를 팔기 위한 수법이었나'라는 생각이 들 때, 점원은 핵심을 꺼냈다.


"여행 가서 사진 실컷 찍고, 돌아와 환불하세요. 여기선 그렇게 많이 해요."


그렇다. 미국은 환불에 대해 대단히 너그럽다. 소비자들은 환불과 반품을 당당한 권리로 생각한다. 상점들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Ask No Questions!)'라는 환불 정책을 경쟁적으로 내세운다. 미국은 쇼핑의 천국이다. 반품과 환불의 파라다이스다.


양심에 털 난 사람들


 미국에는 다양한 세일 시즌이 있다. 소비 충동이 불끈 솟는다 ⓒ pixabay


12월 초가 되면 마트 등 곳곳에서 '진짜 나무'를 판다. 크리스마스트리용이다. 전나무의 은은한 향이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집안을 한가득 채운다. 당연히 1월이 되면 나무는 시들고 말라 죽는다. 1월에 이따금 이런 뉴스를 접한다. 일부 사람들이 시들어가는 나무에 대해 환불을 요청해 마트가 골머리 앓고 있다는 것이다.


전미 소매연합회(National Retail Federation, 아래 NRF)는 미국 소비자가 지난해 4280억 달러(약 484조 원)의 상품을 반품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총 소매 판매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반품된 상품 중 253억 달러(약 6%) 정도가 악의성 반품으로 추정된다.


NRF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100 달러(약11만원)어치의 상품을 반품할 때마다, 소매업체들은 약 6 달러(약7천 원)의 손실을 본다. 가장 많이 반품된 제품은 자동차 부품(19.4%)이었다. 그 다음으로 △의류(12.2%) △주택 실내장식(11.5%) △가정용품(11.5%) 순이었다.


반품이 쉬운 만큼, '양심에 털 난 소비자'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미국에선 '워드로빙(wardrobing)족'이라고 한다. 워드로브(wardrobe)는 옷장이라는 뜻이다. 워드로빙은 자신의 옷장에서 자유롭게 옷을 꺼내듯, 상점에서 마음대로 제품을 구매해 사용한 뒤 환불하는 행위를 말한다.


온라인 학생 커뮤니티에는 △파티용 고가 드레스 △주얼리 △최신 아이폰 등 가전제품 △핼러윈 의상 등을 '공짜로 빌리는 법'이라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모두 원하는 물건을 잠시 구입하고 사용한 뒤 반품하는 워드로빙 방법이다.


미국인들은 매년 2월 초에 열리는 슈퍼볼(Super Bowl)에 열광한다. 1월부터 3월 사이 대형 TV 반품 비율은 다른 시즌보다 훨씬 높다. 새로 산 TV로 슈퍼볼을 신나게 응원하고 시즌이 끝나면 환불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매년 슈퍼볼만큼은 신제품 대형 TV로 관람하는 셈이다.


NRF는 지난해 연휴 기간 판매 상품 반품 비율을 13.3%로 제시했다. 그 기간 반품으로 발생한 비용은 1100억 달러(약124조 원)에 달한다고 했다. 반품을 처리하는 인원을 추가 고용한 것이 비용 증가 원인 중 하나다.


환불은 편리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선량한 소비자가 악의성 환불로 발생하는 비용까지 떠맡지 않을까 해서다. 이익을 추구하는 판매상이 제품가격을 정할 때 환불 비용까지 고려할 테니 말이다.


매장들 수수방관하지 않아


 워드로빙(wardrobing)족은 상점에서 마음대로 제품을 구매해 사용한 뒤 환불한다. ⓒ pixabay


매장들도 반품을 줄이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한다. 기억에 남는 세 가지 제도가 있다.


첫째. 가격 일치제(Price Match)다. 구매한 물건이 다른 상점에서 더 저렴하게 팔리면, 그 차액만큼 상점에서 돌려받을 수 있다. 만약 A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바로 옆 B 상점에서 더 저렴하게 판다면? 보통의 경우, A 상점에서 환불하고 다시 B 상점에 가서 같은 제품을 사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격일치제를 활용하면 이러한 환불이 불필요해진다. 우리는 매장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온라인 마켓 가격과 비교했다. 물건을 사기 전이라면 계산대에 우리가 찾은 저렴한 가격을 보여주면 그 가격이 적용됐다. 사고 난 후라면 그 차액만큼 돌려받았다.


둘째, 가격 조정제(Price Adjustment)다. 일정 기간 내 구입한 제품의 가격이 동일한 상점에서 더 저렴해진 경우, 그 차액만큼 돌려받는 제도다. 만약 정가로 구입한 물건이 며칠 지나 할인을 시작해 가격이 낮아졌다면? 기존에 구입한 물건을 환불하고 할인된 가격으로 재구매 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가격조정제를 사용하면 이러한 환불 역시 불필요해진다. 한번은, 미국에서 10% 할인받아 가방을 샀다. 일주일 뒤 그 매장에서 할인행사가 시작돼 내가 산 가방 가격은 절반으로 떨어졌다. 되레 더 기뻤다. 가격 조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점에 영수증을 제시하고 추가 할인된 금액을 돌려받았다.


셋째, 고객 쇼핑 행동에 대한 모니터링이다. 상점마다 고유의 알고리즘을 구성해, 악의적·상습적인 반품을 거절하기도 한다. 2018년 몇몇 대형 유통망은 반품 내역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회사를 이용해 악의성 고객을 골라내기도 했다.


당시 소비자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통망들은 자체적인 알고리즘으로 고객 쇼핑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영수증 없는 반품 △매장 마감 시간 반품 △단기간 집중되는 반품 등을 유통사들이 유심히 보고 있다고 했다.


미니멀리즘은 저 멀리


그런데도, 대다수 미국 유통업계는 반품정책에 공을 들인다. 미국 소비자들이 유통망을 선택하는 데 있어 '반품·환불 편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객 경험 플랫폼 나바(Narvar)에 따르면, 상품을 반품한 대다수(약 82%)가 단골이다.


미국에는 다양한 세일 시즌이 있다. 소비 충동이 불끈 솟을 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견물생심(見物生心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이라고 했던가. 나도 모르게 카트에 세일 상품을 한가득 담았다.


마지막 계산대 앞에서 이성을 차렸다. '이 모든 물건이 다 필요할까?' 고민을 할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하지 뭐!'라며 나를 달랬다. 막상 물건을 집에 가져오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꽤 많았다. 그러나 '환불 귀차니즘'에 빠졌다.


이런 행동이 몇 번 반복돼, 집 안 구석구석에 불필요한 물건들이 쌓여갔다. 분명 우린 미국에 오면서 '미니멀리즘'을 지향했는데, 어느새 '맥시멈리즘'이 됐다.


사실 여행 가기 직전에 샀던 고가의 카메라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양심상 도저히 환불하지 못했다. 우리 집 카메라는 3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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