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의 방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이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덕스 허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격인 작품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지만, 국내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 모르는 이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고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900년대에 썼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상상력과 통찰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쓰인 시대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직후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전체주의 사회의 맹점을 지적한 작가의 통찰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머나먼 미래에 개인의 고유한 개성과 삶이 사라지고 통제받으며 살아가는 전체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은 이름도 없이 번호로 불리며 국가가 부여한 스케줄대로 평생을 쳇바퀴처럼 산다. 누군가와의 사랑이나 우정도 없다. 주어진 스케줄에 맞춰 사랑을 나누고 동료를 만난다. 철저하게 자유를 억압받고 세뇌를 통해 의식을 통제받았기 때문에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래서 개인의 개성이나 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기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역시 시스템에 순응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 여성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그 여성은 '자유'라는 의식을 가진 반체제 운동가였다. 철저한 통제와 세뇌가 이뤄지는 사회에서도 인간 본연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시스템의 부조리함과 자유라는 본연의 욕망을 일깨워 준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엄청난 고뇌의 과정을 겪는데, 내면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의 고유한 개성과 인간성, 그리고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잘 보여준다. 전체주의 사회의 위험성이나 인간 본연의 가치의 중요성을 그려내는 방식이 정말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우리들'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소설이 그리고 있는 미래가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공상과학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군중 속의 인간 소외와 고독, 균등주의, 감시사회는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그다지 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지난해 발병한 코로나 19는 이러한 상황을 심화시켰다. 유발 하라리가 우려한 대로 정부의 전체주의적 감시체계가 용인되고 있고, AI 기술 도입이 가속화되며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감염 위험으로 인해 사람들 간 접촉이 줄어들어 코로나 블루와 같은 우울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또한 중국은 이미 국민 개개인의 얼굴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거의 완료했다고도 한다. '우리들' 속의 디스토피아 세상이 그리 멀지만은 않은 이유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설 속 세계와 지금의 우리가 사는 현실은 거리가 있다. 아직까지 우리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비인간적인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씩 발생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 공통의 가치는 살아있다. 그런 점에서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는 생각에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만 하며 소설을 읽고 책을 덮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연휴 같지도 않던 설 연휴 첫날, 지인에게 추천받아서 본 영국 드라마 "Years&Years"는 그렇지 못했다.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는 소름이 돋을 만큼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나는 로맨스로 점철된 한국 드라마는 내 취향이 도통 아니기도 하고, 하나의 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낮은 집중력 탓에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는 편이다(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5-20분가량의 짧은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그것조차 스킵해서 보는 사람이 나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이런 내게 지인의 추천작이었던 "Years&Years"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보게 된 드라마였다. 왓챠 아이디까지 빌려주며 꼭 보라는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계속되는 탈락에 벗어나기 힘든 우울감으로 가득했던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새벽, ‘그래 빌려줬으니 봐야지'하며 큰 기대 없이 영상을 틀었다. 솔직히 별 다른 사건이 없었던 초반부엔 영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핸드폰으로 친구와 쓸데없는 카톡을 주고받거나 인터넷 가십 기사를 읽지도 않으면서 계속 클릭했다.
그것도 잠시, 내용이 점차 전개되면서 나는 온전히 영상에 집중하게 됐다. 무언가를 그렇게 집중해서 본 건 오랜만이었다. 드라마는 나의 새벽을 통째로 앗아갔다. 밤새도록 드라마를 봤다. 6편의 짧은 시리즈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아마 더 길었다면 연휴 내내 드라마만 보고 있어서 이 글조차 쓰지 못했을 것 같다..). 드라마는 지인 말대로 '취향 저격'이었다. 보는 내내 연출력과 스토리에 감탄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생각해서 전개해나가고 또 그걸 이렇게 영상으로 연출할 생각을 했을까. 대학시절 단편 영화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기도 하고, 배경이 되는 런던에 자주 방문했기도, 또 맨체스터 근교에 한 학기 정도 살면서 브렉시트로 불안정했던 상황을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그 내용과 연출력이 더 현실적이어서 놀라웠던 것 같다.
드라마는 대충 이렇다. 브렉시트 이후의 2019년부터 2035년까지의 영국 사회 변화를 한 영국 가족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짧은 여섯 편의 에피소드지만 각기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통해 정말 많은 담론들을 다루고 있다. 난민, 동성애자, 미혼모, 장애인, 유색인종, 몰락한 가장, 포퓰리즘,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 등... 그리고 이걸 풀어내는 방식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우리들' 속 미래의 모습이 먼 미래여서 현재의 우리 사회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 드라마 속 영국 사회나 세계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럴법한 가까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라이온스’ 가족은 그 안에서 큰 삶의 변화를 겪는다.
이 드라마가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 모두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라는 점이다. 그 누구도 허투루 쓰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두가 극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서사를 위해 극적으로 또는 불필요하게 희생되는 인물이 거의 없었다(아쉬운 인물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극의 중심이 되는 '라이온스'가는 자칫하면 전형적이기 쉬운 인물들이었다. 전형적인 영국의 중산층 백인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동성애자 사회운동가, 바람 핀 진보주의자 가장, 보수주의 동성애자,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미혼모이자 장애인이다.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온스 일가에 결혼을 통해 들어온 이들도 마찬가지다. 회계사 출신의 흑인 여성, 고등 교육을 받았지만 동성애 탄압으로 난민이 된 동유럽 남성, 이민자 출신 남성 등. 자녀도 마냥 평범하지만은 않다. 트랜스 휴먼, 중국인 혼혈의 트랜스 젠더 등.. 굉장히 다양한 인물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렇게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들은 보통 사회의 스테레오 타입대로 그려지기 쉽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스테레오 타입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여러 정체성이 섞인 인물들의 복합적인 면모가 드라마 내에서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짧은 에피소드 안에서 이를 그려낸 연출가와 작가가 대단할 따름이다.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지점은 '대니얼'을 드라마에서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보수당을 지지하고 지방의회에서 일하는 30대 중후반의 대니얼은 영국 사회의 기득권자에 해당한다. 그가 동성애자이긴 하지만, 극에서 영국은 동성애가 합법화된 나라라 그가 딱히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 그는 비슷한 조건의 영국인 남자와 결혼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대니얼은 교사인 남편이 가짜 뉴스를 믿는 모습을 보고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쯤, ‘빅토르 고라야'라는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을 만난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만큼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였지만 극우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정치적 박해를 피해 유럽으로 온 이였다. 그들은 대니얼이 관할하던 난민 보호소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서로에게 반한다. 하지만 대니얼은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끌림을 애써 부정했다. 가상의 중국 인공 섬 '홍샤다오'에 핵폭탄이 떨어지며 전쟁의 불안감에 휩싸여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힌 그때, 대니얼은 남편을 제치고 빅토르에게로 달려갔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후 이혼한 대니얼은 난민 출신의 빅토르가 영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돕는다. 전형적인 중산층의 교육받은 백인 남성이 난민 애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그를 돕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그가 빅토르를 사랑해서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난민 수용에 큰 관심을 두고 수용소를 애정으로 운영해오던 대니얼의 모습에서 모종의 책임감까지 느껴졌다.
보수당을 지지하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남성을 비틀어 그가 동성애자이며, 난민 보호에 앞장서고, 또 난민을 위해 죽기까지 하는 드라마의 플롯이 굉장히 색달랐다. 그리고 이를 그려내는 방식도 진부하지 않았다. 난민 문제에 대해 뻔한 교훈이나 경각심을 주는 게 아니라 공존에 대한 메세지였기에 더 인상 깊었다. 사실 유럽에 살때 가장 무서웠던 존재는 난민들이었다. 내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던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난민 수용 이슈가 있었을 때 마냥 찬성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난민 발생의 근본적 원인이 서구 국가들에게 있다는 점에서 유럽 선진국들이 그들을 내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정책의 변화로 난민들이 겪는 어려움들 역시 단편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이렇게 생각할만한 지점들을 휘몰아치는 전개 속에서 계속해서 제시해준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내용들을 곱씹었던 것 같다.
직접적으로 극을 이끌어가진 않지만 극 전체를 관통하는 또 다른 인물은 비비안 룩이라는 기업가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2019년 티브이 토크쇼에 출연해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I DON'T GIVE A FUCK"이라는 말로 유명해진다. 이후 자극적인 발언들로 유명해지고 인기를 끌어 'FUCK'을 '****'로 가려 보도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기원한 '사성당'을 창당하고(이탈리아의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당이 연상되는 지점이다) 하원의원이 되고, 결국 총리까지 된다. 그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로 그려진다. 이때 미국의 트럼프와 영국의 비비안 룩, 스페인과 유럽 국가들에서 포퓰리스트들이 득세하며 세계정세가 어떻게 변화하고 또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가 라이온스 가족을 통해 그려진다.
이 모든 미래는 상상력에 기반한 허구지만, 정말 현실적으로 일어날 법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우리들'보다 좀 더 현실적인 2019년 디스토피아라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드라마에서처럼 트럼프는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세계는 포퓰리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멀게만 느껴지는 정치의 위기가 우리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위협이 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이로 인해 붕괴되어 가는 한 가족의 삶은 보는 내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리고 라이온스 가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는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디스토피아가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지적하는 제작진들의 경고음이라고 느껴졌다(연출가는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들을 드라마 속 인물이 극 내부의 TV에 출연하여 시청자를 향해 말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부러 화면 밖 우리들과 눈을 맞추는 기법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강조하려 한 것 같다). 마지막 할머니의 가족 연설이나 중간중간 다소 훈계조(?)의 어찌 보면 계몽하려는 듯한 부분이 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고 작품의 교훈을 요약해서 던져주는 듯하여 괜찮았던 것 같다.
아무튼 디스토피아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우리들'과 'YEARS&YEARS"는 꼭 한 번쯤은 보면 좋을 법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글을 쓰다보니 많이 정돈이 되지 않은 채로 글을 쓴 것 같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생각을 정돈하고 글을 다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