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안아주세요.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윗 층 아이들 공간에서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투닥투닥 소리가 들리더니 결국 둘째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언니가 욕하고 때렸어!” 큰 아이를 불러내려 차분히 상황을 물었다. 대번 윽박지를 엄마를 예상해 긴장했던 큰 아이는 평소와 다른 나의 모습에 긴장을 풀고 싸움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달래고 타이르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후, 윗 층으로 올라갔다. 화내지 않고 조용히 말하는 엄마의 태도에 안심하고 한편으로 따뜻함도 느꼈겠지만 사실 화 낼 기운이 없었다. 내게 매년 11월은 계절의 분위기 탓인지 최고조의 우울감이 밀려오는 시기다. 게다가 지난 주말 남편과 있었던 불화까지 더해 기분이 축 쳐져있기도 했다. 글쓰기 선생님의 현명한 조언을 받고 잘 풀긴 했으나 아직 무언가 남아 속이 꽉 막힌 느낌에 기운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무거워 느지막이 일어나 산책도 하고 아이들과 맛있게 식사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기운에 가만히 앉아 쉬는 참이었다.
큰 아이를 올려 보내고 둘째를 불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둘째에게도 차분히 상황을 물었다. 둘째 역시 혼날 각오를 하고 내려온 듯 했는데 부드러운 엄마의 말투 때문인지 금세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는 서럽게 울며 언니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했다. 언니가 이랬어, 저랬어 하며 말을 하다가 “왜 언니는 나를 착하게 대해주지 않는 거야?”라고 했다. 다른 언니들처럼 내 언니도 학교 가는 길에 손을 잡아 주고 따뜻하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언니한테 먹을 것도 주고 물건도 나누어 주는데 언니는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다고 울면서 말하는 둘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을 마치고 젖은 눈으로 나를 보는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안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엉엉 울며 안기는 둘째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말했다. “언니도 곧 소윤이처럼 따뜻해 질 거야. 언니가 차갑게 군다고 소윤이도 그러면 계속 싸우기만 해. 언니가 차가울 땐 엄마가 더 많이 안아줄게.” 한참을 내게 안겨 울고 난 둘째 아이를 올려 보내고 난 후, 오히려 위로를 받은 건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보드라운 몸과 따뜻한 온기가 무거웠던 내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남편은 연애 경험이 전무했다. 나와의 연애가 처음이었고 결혼까지 했으니 여자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이 서툴러 하나하나 가르쳐야 했다. 연애 때는 매력으로 다가왔던 서투름이 결혼 후엔 어찌나 답답한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특히, 싸우고 난 후에는 내가 기분을 풀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는 그였다. 감정을 풀어주길 기다리다 지쳐 왜 답답하게 가만히 있기만 하냐 물었더니 그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화난 이유도 모르겠고 왜 그렇게 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도 못하겠고. 이유를 모르고 이해도 못하니 화를 풀어줄 방법은 더더욱 떠오르지 않는다는 남편의 말에 기가 막혔다. 그 때 이렇게 말했다. “모르겠으면 그냥 ‘인영아’ 하면서 안아주면 돼. 그럼 화가 풀려. 난 자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안아주는 게 제일 좋으니까.”
그동안 잊고 있었나보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이제는 서로 단백하지 못해 밍밍한 사이가 된 걸까? 그래도 다른 부부들 보다 스킨십이 있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기계적 터치로 남들보다 낫다고 위안삼고 있었나. 지난 주말 있었던 그와의 불화는 사실 내 여성성에 대한 자존감을 다치게 했던 일이었다. 대화로 감정은 풀었지만 가라앉은 자존감이 돌아오지 않아 우울했었다. 대화와 함께 마음이 담긴 따뜻한 포옹이 있었다면 마음이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요즘 부쩍 퇴근이 늦은 그가 돌아오면 십년 전 그 때처럼 부탁을 해봐야겠다. “아직 내 기분이 풀리지 않았어. 그러니 ‘인영아’하고 나를 안아줘.” 라고.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부디 그의 진심이 담긴 물리적 애정 표현을 받을 수 있기를. 글을 쓰며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