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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경 Oct 27. 2023

빨래

안과 바깥의 이야기

프랑스 화가 장 뒤르페가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의 예술을 표현하여 ‘아르 브뤼’(있는 그대로의 미술)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를 1972년 예술 평론가 로저 카디널이 번역어로 다시 ‘아웃사이더 아트’로 부르면서 지금은 통용하여 쓰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정식 교육을 받고도’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로 사는 사람들은 정말 많다. 아웃사이더, 인사이더는 내 기준이 아니라 남 기준으로 판단되는 선이다. 그 선 안과 바깥이 있다면 그 위치는 과연 누구에게 중요한 걸까. 아무것도 없는 하얀 종이를 보면서 한참을 생각한다.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전문교육을 받고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아웃사이더 라이프’에서 시작해 ‘마이 라이프’로 가는 길이 아닐까…

친구가 밴드에 올린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툭 건든다. 종종 그리고 싶은 사진을 발견하면 사진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자료로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사진이 처음 올라왔을 때 내 눈에는 가파르고 높은 계단이 제일 먼저 보였다. 뒤이어 알록달록 성냥갑 같은 집들 풍경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6.25전쟁 피난민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라니 살기가 고됐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살기가 고되다는 것은 바깥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오밀조밀 붙어있는 작은 집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다정해 보인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감사해 하며 행복하게 살 것 같다. 된장찌개에 김치 하나만 놓고도 밥을 맛있게 먹고 깔깔거리며 와글와글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울고 웃는 사연들이 차고 넘치지만 인간적인 연민을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이 어느새 내 머릿속에 한가득 차올랐다. 사진에서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주 가볍게, 마치 유치원생이 <행복한 우리 집>을 주제로 사사사삭 그리듯 쉽게 그리자. 스케치 없이 물붓으로 바로 시작한다. 사진을 보면서 물통에 붓을 담근다. 마음껏 물을 먹은 붓으로 커다란 아우트라인을 잡는다. 물붓으로 스케치를 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투명 그림 안에 물을 가두고 재빠르게 붓을 움직여 팔레트에 물감을 푼다. 물이 마르기 전에 날렵하고 정확하게 손을 써서 충분한 물감을 붓끝에 묻힌다. 물을 아직도 안고 있는 종이에 붓끝을 살짝 갖다 댄다. 순간 눈 깜짝할 새 색깔이 촤아악 퍼져 나간다. 종이는 어떠한 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도 하얀 종이가 된다. 아직도 종이에서 퍼지고 있는 물감을 깨끗한 붓으로 살살 달랜다. 자연스럽게 이리저리 끌고 와 몇 개의 집과 지붕, 계단을 만들고 더 진한 색을 입힌다. 

이제 사진 속에 있는 현실의 마을은 나의 상상 속 이야기로 넘어간다. 따뜻한 햇볕이 드는 마을이다. 작고 소담스러운 화분도 하나 놓인다. 맨 아랫집은 이 동네서 제일 부잣집이라 문에는 무늬를 새긴다. 마음도 좋아 동네 어려운 일은 죄다 이 집을 통한다. 그 바로 위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집에는 담도 문도 없다. 튼튼한 빨랫줄에 빨래가 널려있다. 그 뒤로 쪽마루가 반들반들하다. 빨랫줄에 널린 이불 홑청은 오래된 것이다. 바래고 낡았지만 그래도 아직 색이 곱다. 수건은 찌그러진 세숫대야에 비누 거품을 잔뜩 내 푹푹 삶았다. 뭐니 뭐니 해도 살림 중에 으뜸은 빨래인데 빨래는 부지런함과 정성이 있어야만 한다.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빨래는 삶에 대한 의욕이다. 그래서 빨래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전 첫 집 쪽마루에는 깨끗한 빨래가 지나는 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한다. 주인은 안에서 지나가는 바깥사람을 보고 웃으며 앉았다 가라고 손짓한다. 

 '바깥'이 없으면 '안'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안과 밖은 뒤집히기도 한다. 결국 선이 의식되는 삶이란 스스로가 자연스럽지 못한 인생을 산다는 뜻이 아닐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서서히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는 나의 삶을 상상해 본다. 이제는 서서히 내 마음에 새겨진 진한 선을 지울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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