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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경 Nov 02. 2023

사각사각 사박사박

비움이자 시작

연필이 사각사각 종이를 스친다. 떨어질 듯 손가락으로 가볍게 쥔 연필이 종이 위를 지나면 뭐랄까 그 소리에는 감정이 있다. 아니, 이건 나의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첫눈이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다. 대개 첫눈은 온 듯 안 온 듯 내려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서 봤네 못 봤네 행복한 다툼을 만든다. 하지만 오늘은 지켜야 할 것이다. 첫 새벽 문을 여는 순간 하얀 세상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고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첫눈의 약속을 끄집어 낼 것이고 괜스레 마음은 바빠질 것이다. 종일 기다림으로 애탄 발걸음을 서두르겠지. 약속을 지키려는 수많은 인파와 수많은 사연과 수많은 사랑이 청계천에 쏟아지면 온통 행복이 넘쳐날 거야. 

시끄러운 청계천을 그릴 생각이었다. 따뜻한 겨울 외투를 입고 장갑을 끼고 눈이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활짝 웃는 사람들을 그리려고 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봄직한 풍경이 떠오르고 이어 청계천의 활기찬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들뜬 사람들의 웃음과 재잘재잘 청계천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이곳에 사연을 묻었을까. 이렇게 요란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수백 년 청계천의 시간을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디쯤에 나의 과거도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것만 같다. 말로는 온전하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득 껴안고 세월을 관통하는 청계천이 마치 인생의 어느 한 시점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나의 어느 시간이 청계천에 머물러 있다면 이제 흘려보내고 싶었다. 다음의 활기찬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었고 또 그럴 나이가 되었고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충분해졌다.

심하다 싶게 연필심을 길게 빼고 갈지 않았다. 연필심의 각도에 따라 선의 느낌이 다르고 그림을 그리면서 저절로 심이 갈려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각도를 찾아 그림을 그린다.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 청계천이 기분 좋게 그려진다. 느낌이 좋다. 멈춘 듯 고요한 청계천을 스케치하는 선이 가볍게 종이 위를 나른다. 이는 곧 그림을 그리는 나의 마음이 가볍다는 증거다. 어느새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온전하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기본 블랙을 물감이 아니라 연필로 명암을 넣으며 형태를 완성해 나간다. 블랙은 모든 색을 흡수하기 때문에 강한 힘을 가진다. 부정적인 의미도 많지만 깊게 빠져들지만 않으면 적절하게 자기방어도 잘하는 색이다. 또 흰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인다. 화이트로 블랙을 감싸며 전체 색감을 밝게 만들 계획이지만 물감은 최소한만 쓸 것이다. 어둠을 메꾸면 하얀 부분은 저절로 드러난다. 만남과 이야기가 넘치는 청계천이 긴 세월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를 검정이 흡수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조용히 가라앉은 그 모든 이야기는 영원히 잠들어 있다가 자기의 청계천을 기억하는 사람에 의해 하나씩 하나씩 눈처럼 녹아 사라질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언제까지나 새로운 이야기는 이어질 것이다. 

청계천이라는 장소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지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이다. 자주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만큼 항상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 청계천이 나의 어느 한 시점의 경계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울 태생으로 아마도 청계천이라는 장소가 나의 과거를 대표하는 곳으로 여겨지면서 그 경계를 허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놓지 못하는 과거와 실제를 살지 못하는 현재가 주술처럼 통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울고 웃는 시간들을 지나 여유로움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의 그림도 그리는 동안 시간이 단계 단계를 넘어 평안해지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연필이 지나고 사박 사박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청계천은 어젯밤까지 들려온 이야기를 간직한 채 잠들어 있다. 모든 색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화이트는 새로운 도전과 생동감을 받아들인다. 흰 부분을 깨끗하게 남기는 방법으로 완성해 나갔다. 요란하지 않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검정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화이트는 어둠과 밝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둠과 밝음 사이에 존재하며 나의 세상도 그 사이 어디쯤에 항상 있었을 것이다. 삶은 고요한 새벽 청계천처럼 흔들리지 않으며 잠에서 깨나면 행복한 이야기는 또다시 이어질 것이다. 유난히 연필 소리가 눈 밟는 소리처럼 경쾌하다. 과거도 현재도 잠에서 깰 시간이 되었다.


무심한 듯하지만 모든 색을 다 잡아먹는 색이 블랙이다.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땐 그래서 블랙 안으로 숨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좋지만  힘을 가지고 있는 색이기도 하다. 화이트는 그 색 자체로 비움이자 시작이다. 블랙이 모든 걸 다 흡수하듯 화이트 역시 의미는 다르지만 모든 걸 다 받아들인다. 하얀 종이 위에 그리고 싶은 걸 마음껏 그리고 색칠하듯 우리 인생도 내 손에 쥔 연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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