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에 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것 보다는 필드에 올인하며 즐기는 성향인지라 이 다이어리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1년 반동안 쓴맛에 가까운 CPO 직책의 참맛을 경험하고 다시 안락한 사유의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손에 한아름 얻은 것이 가득하지만 잃은 것으로 말하자면 무려 건강입니다. 지속가능한 프로덕트의 성장을 고민하던 인간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니 하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직무 관련한 글을 쓰고 약간의 히트를 쳤다 하더라도, 그 글이 내면적으로 또 시기적으로 죽은 지식이라는 생각이 들면 글을 속속 지워버리는 터라 아카이빙이 약합니다. 서비스기획과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방법론은 제 커리어에서 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필드의 변화가 워낙 빠르고 시장상황이 다채롭다보니 방법론보다는 일의 원칙 principles을 내재화 하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가령 2024년 말 현재, 국내 시장은 극도로 얼어붙어 있고 많은 기업들이 비용 뿐만이 아니라 아예 자산을 처분하여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요즘같은 시절에 네이버 같은 빅테크에서 10년 전에 만들어 이미 자리잡은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서스테이닝하고 그로스 하던 제 경험을 설파하는 것은, 듣기에는 흥미로울 수 있지만 향후 몇년 내 동료들에게 도움이 될 지식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카카오 공동체에서 기술기반의 서비스를 성공궤도에 올려놓는데 크게 실패한 사례는 있지만 오늘의 글의 주제와는 약간 어긋나 다음 기회를 가져보겠습니다.
그로스와 스케일링이 재미있을 시기가 있었습니다. 데이터 기술이 완연해지고 이 플랫폼 운영 비용이 크게 줄면서 그 위에 커머스나 SNS 등 응용 어플리케이션이 꽃피던 시기 - 즉, 검색 위에서 놀던 시기, 그리고 스마트폰이라는 뉴 디바이스가 나오고 새로운 UX의 프로덕트가 필요했던 시기, 과거 크게 두 지점에서 한국 IT시장에도 자본이 쏟아졌고 누구나 확장을 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발전은 1990년대 IT버블과 2008년 모기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의 통화정책과도 긴밀히 연결이 되어있는 것으로, 거시경제의 여파가 직무시장도 직격으로 뒤흔듭니다. (더불어 코로나 특수 상황도 그러하였네요. 물론 코로나는 AI에 자본을 몰아주고 다른 분야는 뭔가를 줬다 뺐어버렸습니다만...) 지금 한국은 불황이지만 미국은 성장 독주가 이어지고 있는데, 미국 빅테크들이 생성형 AI로 자본을 전부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응용 어플리케이션이 비즈니스로 꽃펴서 PM들에게 기회가 돌아가기까지 아직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해보입니다. 아직은 엔지니어들의 시대이고, AI 인프라와 설계 비용이 줄어들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IT업계의 문과생들에게는 혹독한 시기인 듯 합니다.
짧다면 짧고 적당하다면 적당한 기간동안 CPO 직을 수행해보니, 20대 후반 저를 설레게 했던 미니 CEO라는 역할은 CPO가 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직책을 수행했던 회사는 연 매출 700억의, 스타트업이라고 하기에는 꽤 크고 중견기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모자란 곳이었는데, 그런 정도의 회사 마저도 스마트하고 로지컬한 전략이라고 하는 것이 도통 통하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시장의 불황이랄지, 레거시 인프라라던지, DX 과제랄지 하는 특수한 상황들이 많이 겹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어떤 필드도, 호황에도 이런 특수한 상황이 복잡하게 엮여있지 않은 회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한 것과 현장은 점점 동떨어져 갑니다.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이겠죠. 아무래도 이 지점에서 원칙을 이야기 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어떤 시절에도, 어떤 시장 상황에도, 스케일링이 되었든, 불황의 비용절감의 이슈가 되었든 시장에서 한결같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렵고, 가장 필요로 하는 것(또한 그래서 가장 시장에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1) 설계 2) 딜리버리 3) 팀웍을 만드는 리더십 세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설계와 리더십도 극단적으로는(?) 제대로 된 딜리버리를 위해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으니, 셋중 단 하나만 꼽자면 딜리버리 역량을 꼽겠습니다. 전략도, PMF도, 데이터 분석도 다 좋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동료들과 한 팀이 되어 딜리버리를 하는 경험이 가장 값지고, 소위 전문가로서 가장 반복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딜리버리가 실패했을 때 회사에 가장 큰 타격을 준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 합니다.
딜리버리는 제품을 릴리즈하여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지칭할 수 있으니, 프로덕트 매니지먼트의 대부분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굳이 딜리버리라는 용어를 써서 짚은 이유를 조금 더 개념적으로 설명하면, 크게 제품의 전략과 실행이 있을때 실행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프로덕트를 공부하다 보면 Why to Make, 전략, 판짜기, 포지셔닝에 비중을 두는 방향, 즉 머리를 쓰는 방향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획이란 무엇인가, 전략이란 무엇인가, PMF란 무엇인가의 정의define 을 명확하게 하여 관념적 안정을 찾으려고 하며, 물론 이런 공부가 꽤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 딜리버리를 위한 실행은 상당히 피지컬한 작업으로, 끊임없는 계획과 소통, 실천과 피봇으로 반복 점철되어 있고, 정신력과 체력의 싸움이며, 진짜 싸움이 되기도 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입니다. 왜 이런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지 끊임없이 낙담하는 과정이 바로 실행인 듯 합니다. 전략은 사기치고 뒤집고 때려잡는 척을 하여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지만 (물론 이러면 안되는건 기본이고요) 딜리버리는 실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사기를 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과정의 특성을 놓고 보면 딜리버리에는 특별한 왕도나 방법론이 없어보입니다. 딜리버리의 핵심 역량은 동료를 사랑하면서 상황을 포용하고 인내하는 기반, 제품이 제 형태를 갖추는 결실을 맺을 때까지 꾸준하게 시도하고 대응하는 기반, 즉, 인품인 듯 합니다. 다소 설계 능력이 떨어지거나 문서작업이 깔끔하지 않더라도, 멋진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더라도, 인성이 뒷받침 될 때, 이 인성의 힘이 조직의 힘 전반으로 퍼져나갈 때, 비로소 끝내 팀이 되고 딜리버리가 성공하고 사업에 기여하는 것을 저는 늘 발견하였습니다. 인성의 계발은 어떤 직무 책도, 방법론도 가르쳐줄 수가 없고 오로지 내면의 훈련과 실천으로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인성이 빻아보는 큰 실수들과, 도저히 함께하고 싶지 않은 반면교사와 같은 실패,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큰 자산이 됩니다. 그러니, 짜치다고 생각되는 지금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시면 좋겠습니다.
생각해보면 프로덕트 매니지먼트가 아니더라도 모든 일의 깔때기 최상위 원칙에는 바로 이 인품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론밖에 내릴 수가 없네요. 나머지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정리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전부 죽은 지식이 될 듯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길어질 수도 있는, 아마도 은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기도 하는 또 한번의 퇴사를 하고나서, 제가 약 17년간, 더 넓게는 약 20년간 사랑하고 사랑했던 이 직무에 대해 어떤 갈음을 해야 할까 새벽 내 고민한 결론을 아침에 브런치에 부리나케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황, 추워지는 가을, 출근길, 다른 생산적인 생각을 다 제치고, 어제 힘들었던 일을 잊으시고, 눈을 감고 사람들을 생각하며 따뜻함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따뜻함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않고 창조해보셨으면 합니다. 가을 잎의 투명하게 붉은 색깔과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 그 디테일을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그게 가능합니다. 모든 서비스기획자, PM, PO 분들에게 오랜만에 응원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