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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Nov 21. 2024

혼돈 속에 싹텄다가 스러지는 새싹

10대 시절의 내게 사회란, 매일 뚜렷한 존재감으로 햅삐를 외치던 날라리들과 맨 뒤에 앉는 짱, 짱 옆에 앉는 애, 2분단과 3분단 두 번째 줄에 앉아 수업을 듣는 범생이들, 4분단 세번 째 선풍기 칸에 앉는 애와, 전교 왕따, 대머리 독수리 학주, 무능한 담탱이, 창조적인 로직으로 매일 누군가를 때리던 기술, 남자애들이 침을 몰래 뱉어 묻히면서 은밀하게 괴롭히던 국사, 아이앰그라운드,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그리고 범생이도 아니요 놀지도 않는, 그저 경계인일 뿐이었던 나로 구성된 대혼돈의 카오스였다.


나는 학교를 무척이나 싫어했어서 중학생 때 한 번, 고등학생 때 한 번, 엄마에게 자퇴하겠노라 선언한 적이 있다. 엄마는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라~고 했는데, 도대체 엄마가 펄펄 뛰어야 나도 내 주장을 하는거지 너무 덤덤하게 나오다보니까 그때마다 머쓱하게 자퇴의지를 철회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내게 밴드와 그림, 머드게임이 아니었다면 학교라는 사회는 금방이라도 몸이 찢어질 것 같은 불지옥에 불과했다. 나한테는 선생이건 학생이건 시스템이건, 그 어떤 범주도 폭력적이지 않은게 없었다. 애들에게는 순수하거나 순진한 구석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선생들은 자주 감정적이고 무능했고 변덕스럽고, 그리고 애들을 너무 자주 때렸다. 게다가 학교 수업은 돌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학교가 언제부터 어려웠을까 생각해보면 무려 국민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자쓰기 시간이었고, 제한 시간이 있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담임 선생님께 노트를 제출하고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는데, 시간을 10분이나 넘겨 나하고 어떤 애 두 명만 남게 되었다. 나는 한자 한자 글자를 노트에 눌러 쓰느라 세번째 손가락에 시뻘겋게 자국이 난 채로 노트를 선생님에게 가져갔다.


“왜 늦었어?” 그녀가 앙칼지게 물었다가 내 노트를 보고는 “예쁘게 쓰느라 늦었어?” 라며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도장을 찍었다. 안도하며 자리로 돌아가는 참에 내 뒤로 꼴찌가 선생님에게 노트를 제출하러 뛰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예쁘게 쓰느라 늦었어? 하나도 안예쁘잖아!! 앙칼진 목소리로 꼴찌에게 몇 분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담임을 보며, 일곱살의 내게 생존의 법칙과 우월감, 민망함, 수치심 같은 것들이 밀물처럼 들어찼다. 이런 종류의 양가감정이 쌓이기 시작한 내가 10살이 된 해 3월에는, 결국 폐렴과 사춘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나는 입원을 했다가 퇴원을 했고, 이마에 여드름이 났고, 친구들의 물건을 훔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몸이 아파 학교를 자주 빠졌다.


우리 엄마가 학교 선생님이고 아빠가 신문기자였기 때문에 나는 종종 특별대우 까지는 아니어도 예외처리(?)가 되고는 했다. 가끔씩 엄마 확인을 받아야 하는 숙제를 해오지 않은 것에 면제를 받았고, 시발 시발을 달고 살던 날라리에게 쌍뻐큐를 날리고도 야, 쟤 아빠 기자야 건들지마 한마디에 별다른 난투극이 벌어지지도 않았다. 적당한 성적을 통한 쌤들의 보호막, 학교에 한 번을 찾아오지도 않건만 뒷배로 작용하는 부모님의 직업 같은 것들은, 예민한 내게 감사의 마음보다는 기묘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무엇이 유리한 것인지를 알게되면서부터, 내게 사회는 폭력과 안위, 그걸 이용하면서도 완전히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경계선이라는 삼분지의 구성으로 나뉘어 한층 복잡해졌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 담아둘 만한 소소한 일들도 더러 있었다.


수능과 전혀 관계없는 고3 문학 시간에는 한 두명 빼고 모두 단체로 꿀잠을 잤다. 늦여름의 더위, 운동장에서 아스라이 축구하는 소리, 선풍기 도는 소리와 파리가 앵앵대는 소리 정도는 가볍게 압도하는 잠의 침묵 가운데, 문학쌤은 뒤에 벽인지 천장인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마치 카세트 테이프를 튼 듯이 수업했다. 나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동정심 때문에 간신히 수업도 듣고 시키는 대로 글도 쓰고는 했는데, 어느날 강아지에 대해 끄적이고 있던 몇 토막의 글이 그의 눈에 띄었고, 평소 기계적인 수업과는 분명하게 대비된 짧고 굵은 칭찬이 이어졌다. 이후 문학 시간에 나는 아마도 한 두번 정도인가 더,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쓴 글을 읽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그 수업을 특별히 좋아하게 되거나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다. 고3의 가을무렵부터 나 또한 문학 시간에 정신없이 잠을 자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학은 간암으로 죽었다. 나는 대학 신입생이 된 해에 그걸 알았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첫 균열이 과연 폭력에서 일어났을까 생각해본다. 그게 아니다. 상처란 것은, 이번 주에 쟤가 왕따였으니까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나도 다음주에 왕따가 돼야 하는 스케쥴러 같은 관계놀이랄지, 내가 다른 그룹에 있는 친구와 단지 교무실에 갔기 때문에 일주일간 따돌림을 받은 사건 같은게 아니다. 자기에게 실수로 걸레빤 물을 묻힌 ‘작고 흰 여자애의 손’을 찾아내기 위해, 비슷한 외모의 여자애들을 세워두고 고성을 지르던 노처녀 수학의 폭력 같은게 아니다. 내 머리나 감정으로는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는 혼란의 가운데, 아주 새싹같이 여린 나의 가능성을 바라보던 시선, 그 옅은 주파수의 인정사정없는 흩어짐이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문학에는 정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 또한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던거다. 내가 나를 놓친 것일 뿐이다. 그 사실에 가슴부터 손끝까지 저렸다.


10대 시절의 내게 사회란, 촘촘한 폭력과 그 폭력을 비껴가게 돕는 생존 법칙, 경계선에서 정신차리지 못하는 나, 그런 나에게 주어진 찰나의 여린 관심과 그 스러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20대와 30대의 사회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타인의 죽음, 구조적 폭력, 생존의 법칙, 마음의 경계에 격렬한 발작을 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누가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내가 진작에 스스로의 힘으로 초점을 맞춰야 했던 것은 나를 향한 그 부서지기 쉬운 관심과 주파수다. 오로지, 단 하나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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