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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Nov 28. 2024

조심스러운 인사, 거대한 신비

노원구 하계동에는 학여울청구아파트가 있다. 내가 초등학생 때, 그곳엔 아파트가 없었고 한내마을이라는 판자촌이 있었다. 내가 살던 신도시 아파트와 한내마을 사이에는 시커멓고 육중한 철문이 경계를 버티고 서있었는데, 그 문의 차가움 때문인지 한내마을은 금기된 땅의 이미지가 있었다.


나는 종종 외할머니를 졸라 그 철문 밖으로 갔다. 문을 나오자마자 바로 나오는 길을 건너,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슈퍼마켓이 목표다. 차가 몹시도 쌩쌩 달렸기 때문에 느릿느릿 할머니의 수신호를 기다렸다가, 파닥닥 슈퍼 안으로 들어가서 50원짜리 대롱대롱 귤맛을 손에 쥐고 나오면 신나는 초딩의 하루가 완성되는 것이다. 한내마을은 슈퍼마켓 뒤쪽으로 펼쳐져 있었고 우리는 절대로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송다혜(가명)네 집에 갈 때, 그 철문 밖으로 나가서 조심스럽게 슈퍼마켓 뒤로 난 길 같지도 않은 길을 걸어야 했으니, 내가 얼마나 모험심에 긴장했는지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


송다혜는 분명 나를 좋아했지만 교실에 있는 동안 하루종일 내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다 하교시간에 선생님의 횡단보도 인솔을 따라가기 위해 등나무 아래 줄을 설 때나 되어서야, 살금살금 내 뒤로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는 했다. 송다혜가 왜 하고많은 애들 중에 나를 찍었는지는 잘 모른다. 키가 나보다 한뼘은 컸기 때문에 교실에서 같이 앉을 일이 없었고, 하교시간에도 나보다 네다섯 줄이나 뒤에 섰다. 걔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린 후, 부리나케 뒤로 가서 숨고, 나는 뒤를 천천히 돌아보고, 분명히 송다혜인 줄 알지만 못본체 하고, 그러면 다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그렇게 세번쯤 하고 나서 내가 환하게 웃으면 함께 집으로 가는 것이 리츄얼이었다.


나는 송다혜의 이런 섬세한 접근법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아홉살의 내게는 타자라는 개념이 분명치 않아서, 어떤 프로세스와 노력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도 나를 졸졸 쫓아다닌 여자애가 있기는 했다. 걔는 하루종일 지여나! 지여나!! 하고 소리를 빽빽 지르며 나를 불렀는데, 그래서인지 내게 타자란 내 이름을 부르는 사이렌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그저 반응을 하기만 하면 충분했던 것인데… 그러다보니 종종 내키는 대로, 별 심통 난 것도 아니건만, 송다혜의 어깨노크에 반응을 하지 않는 날들도 더러 있었다. 세번째의 노크에도 내가 모른체 하면 송다혜는 절대 네번째 노크를 하지 않았고, 어제는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는 법도 없었다. 변덕스럽고 냉정했던 어느 날도 혼자 집을 향하던 중이었는데, 문득 내게 거절당한 송다혜의 표정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 가다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자 앞머리에 외꺼풀인 송다혜가 저 멀리서 고개를 숙인채 천천히 따라오는 중이다. 나는 어떤 측은함과 쓸쓸함에 그만, 다혜야- 하고 부를 수밖에 없었고, 죽을 상에서 환한 빛으로 변하는 송다혜의 표정을 본 뒤로는 다시는 그의 어깨노크를 모른체 하지 않았다.


1년 동안 하교길 친구이기만 했던가? 송다혜와 교실에서의 에피소드는 마치 백지처럼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송다혜가 자기는 4학년 올라가자마자 전학을 가야한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봄방학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의 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우리집에서 먼저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송다혜네 집에 내가 데려다주는 것이 계획이었다. 송다혜는 우리 집에서 까만 스타킹을 빌려 입었고, 다음날 오전 내내 빈둥거리며 놀았다. 그리고 해가 중천을 넘어가기 시작한 낮에는, 둘이 부엌에 서서 주황색 빛을 바라보며 엄마가 끓여 둔 된장찌개에서 팽이버섯과 두부를 골라먹었다. 이제 내가 송다혜네 집에 바래다 줄 차례였다. 그러나 구불구불 미로같은 길 풀숲을 용감하게 헤쳐나가는 것이 바로 송다혜고 나는 그녀의 인도를 받는 초보 모험가였을 뿐이었다.


아직 찬 바람이 불었지만 해는 따뜻한 날이었다. 그 차갑고 시커먼 철문을 지나, 쓰러져가는 익숙한 슈퍼마켓의 뒤를 돌아, 구불구불 갈색 풀 길을 걸어 금기의 땅으로 접어들었다. 이게 길이 맞는가 의심했지만 자세히 보니 길 같은 것이 나있기는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소리가 땅 밑으로 가라앉았고, 곧 예전에 어떤 성벽의 일부였던 것만 같은 부서진 담벼락들이 나타났다. 앞서 사람이 마주온다면 누군가는 비켜서 붙어야 하는 좁은 길목으로, 노란 햇빛이 담벽 바깥에서 빛나고 위쪽으로는 하늘의 하늘색이 골목 만큼 좁게 구불구불 열려 있었다.


[여기 조심해-] 송다혜가 주의를 주었다. 페인트로 여러 기호를 표시한 담들 사이에 발을 디디자 자각자각 깨진 유리가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부서진 창문 안쪽으로 사람이 사는지 살지 않는지는 간간히 널린 빨래로만 알 수 있었다. 기묘하게 졸졸 흐르는 좁은 개울 같은 것들도 한 개쯤 건넜다. 신비로운 시간들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렇지만 정점은 [여기 다왔다-] 하고 송다혜가 펼쳐 올린 파란색 커튼발이었다. 집에 대문이 없었다! 대신에 걷어올린 발은 마치 아라비아의 궁전 커튼 같았는데, 나는 그 광경에 와- 하고 감탄했다. 우리는 곧장, 한평 남짓한 방에 들이닥쳤다. 거기에는 (그토록 상투적으로) 연로한 할머니가 홀로 누워계셨다. 송다혜와 나는 할머니가 비켜주신 아랫목으로 몸을 파고들었고 금세 잠들었다. 눈을 뜨니 늦은 오후였고 온 세계가 침묵에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어렴풋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어떤 동화, 신데렐라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내가 읽어왔던 동화들은 삶에 찌든 어떤 것을 곧이 곧대로 묘사하지 않았다. 생쥐가 노래하고 참새들이 짜주는 물에 세수를 하는 것은 비밀스러운 행복의 신호가 아니었던가? 나는 한동안 화려한 장미정원 대신, 부서진 유리창 정원을 밟고 지나가야 나오게 되는 그곳에 우리집을 상상했다. 빽빽이 높은 담벼락 골목길에 갇혀, 전신주 전깃줄 사이로 별을 바라보며 걷는 것을 상상했다. 머지않아 내게도 나만의 가난에 맞서야 하는 날들이 들이닥쳤다. 내가 맞닥뜨린 일상은 동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정신이 하나도 없고 몸을 망가뜨리는 하루하루의 노동으로 분칠되었다.


몸이 고되면 그 어떤 이미지도 덧붙일 수 없다. 다만 너절한 피로 속에서 질문할 뿐이다. 이게 다인가, 왜 그런가, 원리가 무엇인가, 본질이 무엇인가. 끝없이 물어도 피하고 싶은 노동은 끝나지 않았고, 답이 없음에 악과 분노에 받쳤다가 또 번아웃으로 희미하게 소진되며 그저 무뎌지는게 해법인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이제 왠만한 것들은 다 잃어버린게 아닌가 실망할때 즈음에는 항상 송다혜를 떠올렸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게는 언젠가부터 어떤 은밀한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쇠창살로 막힌 좁은 창문 안으로 오후 다섯시의 빛이 들어올 때, 아빠네 시골집에서 베텔게우스를 바라볼 때, 장작불 안으로 오래된 책을 찢어 넣을 때, 고구마를 구울 때, 엄마의 잠옷을 빌려 입고 부추전을 먹을 때, 그토록 흩어지기만 하는 사소함 속에서 신비를 걷어올리는 힘, 스스로를 위로하는 힘이 있음을 느꼈다. 나는 누군가가 유리구두를 가지고 찾아오는 방식으로 나만의 동화를 쓰지 않았다. 다만, 내게서 절대로 빼앗을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삶의 핵심으로서 신비를 붙잡을 줄 알았다.


아마도 우리가 모험을 한 바로 그 날, 송다혜는 분명한 타자와 개체로서 내 마음에 새겨진 것 같다. 신비스럽고 착하고 가난하고 강한 열 살의 송다혜. 모르는 아이를 친구로 만들고 싶어하고, 실패해도 노력하고, 그가 무심해도 비난하지 않고, 이별을 대비하자고 제안하고, 다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집으로 좋아하는 이를 데려갈 수 있는 송다혜. 내게 타자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물을 수 있게 모험의 길로 이끌고, 고통스러운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걸 놓치지 않게 해준 한내마을의 송다혜. 그는 마치 최초의 던전을 지나온 내게, 신비한 모험가의 모자를 보상으로 건네준 것만 같다.


한내마을은 곧 재개발을 시작했고, 아마도 송다혜네는 재개발의 보상을 받는 집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른들의 사정 같은건 잘 모른다. 한내마을 재개발은 순탄치 않아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고, 뻔한 결말이겠지만, 나는 다시는 송다혜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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