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 비스뵈크의 <내 안의 차별주의자>를 읽고-
"선생님, 우리 아이는 너무 내성적이라 걱정입니다."
"선생님, 우리 아들은 너무 조용하고 말이 없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선생님, 우리 딸이 좀 더 활달해졌으면 좋겠어요."
학부모와 상담할 때 많이 듣는 말이다. 물론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밝은 표정이면서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라면 좋겠지만 그 여러 가지를 충족하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초등 저학년 학생이 부모의 그런 바람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 그건 타고난 기질의 문제인 것 같다. 어떤 노력으로 교육으로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외향적인 사람이 우대받는 세상이다. 아마도 옛날부터 그래왔을 것 같다. 사람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파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서는 외향적 인간이 유리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따지고 보면 백 퍼센트 외향적인 사람도 없고, 백 퍼센트 내향적인 사람도 없다. 어느 성향을 좀 더 많이 가졌느냐에 따라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으로 발현되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외향적인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는 학부모가 모르는 게 있다. 내향적인 학생들이 생각이 깊다. 실수도거의 없다. 다치지도 않는다. 생각이 깊고 글을 잘 쓴다. 공부도 잘한다. 친구들과 싸우지도 않고 신의가 깊다. 멋진 아이디어를 잘 낸다. 감정 조절을 잘하고 평온함을 오래 유지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렇다는 얘기다. 이런 좋은 점이 있다는 걸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매년 다른 30명 가까이의 학생과 생활하다 보니 이런 점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향적인 사람인지 외향적인 사람인지 구별 짓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 생활 곳곳에서 구별 지으려 한다. 우리 고향사람인지 아닌지, 고학력인지 저학력인지 따지기 좋아한다. 내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마 전 국민 취미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타인과 경계 짓는다.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향상하려는 노력보다는 어느 한 집단에 속하여 소속감과 함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강하다. 향상 노력보다는 차별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한 발 한 발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고 아래에 있는 사람을 폄하하기도 한다.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구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나 자신을 우월하게 내세우려고 ‘차별’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에는 인종, 성별, 태어난 나라, 성격 등의 생득적 요소뿐만이 아니다. 빈부의 차이, 신체적 상황, 학력의 유무 등의 후천적 요소에 대한 차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에 대하여 나와 타인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데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겠다. 이렇듯 차별의 행위 자체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
라우라 비스뵈크가 쓴 <내 안의 차별주의자>, 이 책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차별적 요소들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이대로 둬도 좋은지에 대하여 짚어간다. 라우라 비스뵈크는 오스트리아 사회학자이고 현재 빈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사회 불평등의 원인과 행태, 결과를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간 우리들이 얼마나 남을 차별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저자는 직업, 성별, 이주, 빈부격차, 범죄, 소비, 관심, 정치 등의 꼭지에서 우리 안의 차별주의에 대하여 비판한다. 이 중에서 나는 ‘관심’에 대한 챕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시, 내향성과 외향성에 대한 얘기로 돌아간다. 관심(attention)은 ‘외향성의 규범’과 ‘인기 있는 디지털 자아’의 하위분류로 나뉜다. 내향성과 외향성은 성격, 인성 등으로 번역되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말한다. 심리학자이며 정신병 학자인 융이 인간의 성격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내향적 사람들의 심리적 에너지는 자신의 내부로 향한다. 내향성의 사람은 자기 내부의 관념, 생각, 이념 등에 관심이 간다. 내향성의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고 여러 사람 속에 있을 때 에너지가 고갈된다. 심리적 에너지가 자신의 외부로 물리적 외부환경으로 향하면 외향성이라고 하였다. 외향성의 사람은 여러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고 혼자 있을 때는 고립감과 압박감에 시달린다. 외향성의 사람은 타인과의 대화를 즐기고, 바깥 활동을 좋아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여러 단체가 생겨나고 집단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적응해 살기 위해서는 내향성보다는 외향성의 기질이 적합하고 외향성의 사람들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향성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차별과 불이익을 받게 된다. 심지어는 대인공포증, 자신감 결여,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으면서 심리적 고통에 빠져든다. 내향성과 외향성은 속성상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절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생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다. 여러 사람과 만나는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면서 ‘코로나 우울’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코로나 우울은 외향성의 사람들에게 좀 더 크게 와닿을 것이라 추측한다. 내향성의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 외에는 그다지 삶의 변화가 없겠다. 내향성의 사람은 여럿이 있을 때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혼자 사색하고 독서하고 혼자 성찰하는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고 특별히 더 우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외향성의 사람이라고 하여 내향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그래도 다행이다.
외향성의 사람에게도 내향적인 측면이 있고, 내향성의 사람에게도 외향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이제 우리는 내향성과 외향성을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요소라 여기고 그 우열을 따져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요즘 사회가 외향성의 사람에게 유리한 것이 현실이긴 하나, 내향성의 사람에게는 진지하고 사려 깊고 창의적인 면이 강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인슈타인도,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한 스티브 워즈니악도 항상 혼자 일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창의성은 혼자 있을 때 발현되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건축, 수학, 과학, 기술, 시, 문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쌓은 사람들을 같은 분야에서 그러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해 보았다. 이 대규모 인성 테스트의 결과는 창의적인 사람들이 내성적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내성적인 사람들이 항상 더 창의적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창의적인 사람들 중에는 내성적인 사람이 매우 많다는 증거가 된다. 이는 혼자 있어야 창의력과 생산력이 샘솟는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200쪽)
비행기는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다. 좌우의 대립과 협력이 있어야 민주정치도 가능하다. 그래야 독재정치도 막을 수 있다. 세상은 외향성의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도 다양하고 사람들이 타고난 성향도 여럿이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양상 또한 부지기수이다. 이젠 우리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을 거두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한 눈으로 봐야겠다. 내 안의 내향적 측면과 외향적 측면이 소중하듯이 타인의 외향성과 내향성도 소중하니까 말이다. 이 책은 내 안에 들어있는 차별주적 시선에 대한 따끔한 충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