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날아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장석주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읽고-

by 강지영

시인 장석주의 글을 좋아한다. 시와 산문 모두 참 좋다. 그의 글을 읽으면 생각이 깊어지고 내 마음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힘든 세상 살면서 위로를 받는 기분도 든다. 하여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그의 책을 꺼내본다. 책장의 칸 하나를 그의 책으로 채웠다. 책으로만 만난 것이 아니다. 그를 실제로 본 것이 두 번이다. 한 번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그의 한 강좌를 수강했다. 또 한 번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명필름 아트센터'라는 영화관 로비에서였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상영했던 영화가 '벌새'였다. 오늘은 그의 멋진 턱수염을 떠올리며 에세이집을 펼친다. 장석주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유문화사, 2019).


책 서문의 '당신'이 내가 아닌가, 하는 착각으로 읽었다. 연애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시인은 또 서문에서 '돈이 없어 접었던 꿈들, 배고픔, 죽음과 이별, 나를 스쳐 간 많은 기회들...... 하지만 불행이 나를 시인으로 키웠어요.'라고 했다. 시인의 결핍과 나의 결핍도 많은 부분 닮았다. 다만 나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 시를, 책을,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고통, 고뇌, 우울, 불행 등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꼭 불행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토록 시적으로 표현하다니! 불행을 겪어야 행복의 맛을 안다는 말을 전하는 시인의 말은 그대로 시가 된다. 어둠이 있어야 밝음의 가치가 있다.


성미가 급해서인지, 독서를 할 줄 몰라서인지, 책의 '서문'을 대충 읽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다 읽은 후, 다시 서문을 읽는 버릇이 있다. 이 책은 서문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서문의 제목이 '행복을 꿈꿀 권리'이다. 밑줄 친 곳을 옮겨 쓰자면,


'당신이 겪은 불운과 불행에 주눅이 들거나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쓴맛을 아는 혀가 단맛에 더 예민해지는 법이지요.'(6쪽)


'장엄하게 산다는 것은 시련이나 고난 없이 무난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의 원자 하나하나까지 /밝은 빛으로 연소"시키며 사는 것, 생명의 불꽃을 불태우며 사는 것! 그렇게 살 때 우리가 품었던 불운이나 불행도 불꽃과 함께 타서 사라집니다.(...) 자신을 연소시키며 살겠다는 결기가 있다면 웬만한 불행 따위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겠지요.'(8~9쪽)


'같은 현실 속에서 불행의 냄새를 맡는 자는 불행하고, 행복의 기미를 찾아서 그걸 향유하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밝은 태양이 공중에서 빛나고, 그 아래 갖가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가끔은 비 온 뒤 무지개도 뜨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디 마음의 눌린 데를 펴고 더 밝고 더 크게 웃기를!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행복하게 웃는다면 나도 함께 행복하게 웃을 수가 있습니다. 2019년 초여름, 파주에서 장석주'(10~11쪽)


흔히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한다. 처음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절망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건 아니었다.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건강을 잃는다고 다 잃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건강을 잃으면서 사랑을 얻었다. 건강을 잃으면서 겸손을 배웠다. 건강을 잃으면서 생명의 신비도 알았다. 건강을 잃으면서 독서에 취미도 붙였다. 또... 뭐가 있을까. 가슴이 벅찰 만큼 많다. 마음이 건강해지니 몸도 건강해지고, 몸도 건강해지니 마음도 건강해지고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얼마 전에 나는 장염에 걸려서 심한 복통을 안고 내과 병원에 갔다. 그런데 간호사가 엉덩이에 주사를 놓는데, 얼마나 세게 엉덩이를 치며 주사를 놓는지 따끔함도 느끼지 못했다. 철썩철썩 또 탁탁 엉덩이를 치더니, 다 되었어요, 라며 간호사는 주사실을 나간다. 그렇게 터프한 간호사는 처음이었다. 만약 간호사가 살짝 엉덩이를 치고 주사를 놓았다면 살을 파고들어 오는 주삿바늘의 따끔함에 난 움찔했을 것이다. 큰 불행을 겪고 나면 웬만한 고통은 불행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시쳇말로 맷집이 커진다. 내가 너무 크게 비약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날 병원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알코올 솜으로 엉덩이를 문질렀다.


건강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 경제적 문제 자녀교육문제, 사람마다 다가오는 삶의 무게는 다를지언정 어느 누구도 완전무결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좀 더 과장하면, 우울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한 번쯤 돌이켜 볼 일이다. 그간에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 얼마나 많이 흥청대고, 얼마나 많이 쾌락을 좇았던지. 시인의 말처럼 약간의 우울감은 행복의 양감을 두텁게 한다. 약간의 우울감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간의 우울감은 우리를 침묵하게 한다. 작가님은 이 책에서, 침묵의 덩어리에서 진실한 언어가 떨어져 나온다고 했다.


행복에 침묵하자. 행복은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좋은 학교에 합격했다고 날마다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좋은 직장을 얻었다고 평생 좋기만 할까. 맛난 음식이 있다고 늘 그것만 먹을 수도 없다. 새가 날아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머언 훗날 우리가 살다 간 자리도 이와 같으리. 불행에 침묵하자. 불행도 한순간에 흩어져버리는 연기 같은 것. 시인의 말대로 불운이나 불행도 불꽃과 함께 사라지는 것.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리. 하여, 행복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말자. 값비싼 옷, 맛난 음식, 넓은 집이라야 행복한가. 그건 아님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장석주,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유문화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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