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캠퍼스는 한 학기를 마무리하느라 학생과 교직원 모두가 분주합니다. 특히 기말고사 기간에는 아무리 공부에 관심이 없던 학생도 잠을 줄여가며 한 번이라도 책을 더 보려고 애쓰던 게 떠올라요. 시험 감독을 들어가 보면 대부분의 학생이 화장기 없는 초췌한 얼굴, 체육복 바지, 삼선 슬리퍼 등 비슷한 모습으로 강의실에 앉아서 “시험공부 말고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곤 했죠.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시험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해방될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직장생활을 해 보면 매일, 매달, 분기별, 연도별 네버 엔딩 시험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깜짝 놀랄 거예요. 비단 우리의 삶만 봐도 각 시기마다 통과해야 할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오죽하면 “그래도 학생 때가 좋았다”라는 말을 하겠어요.
새내기 직장인 J가 회사에서 중간 역량 평가를 앞두고 제게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J의 회사는 일 년에 두 번 개인 업무 향상 포트폴리오 평가와 함께 외국어 시험을 친다고 해요. 평가 점수가 인사고과에 반영될 뿐 아니라, 기준점에 도달하지 못할 때는 구조조정 되는 살벌한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 거죠. J는 직장인인데도 수험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했어요. 평가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아지고, 위축되고, 긴장되는지, 평소 잘해왔던 일도 덤벙거리며 실수하는 자기 모습과 대면하면서 불안감이 커진 거예요. 계획형인 J는 시험을 대비하여 촘촘하게 ‘to do list’를 작성했다며 보여주었어요. "와! 해야 할 게 이렇게 많다고?" 놀라웠어요. 한 가지 변함없는 J의 마음가짐은 '잘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요. ‘어떡하지’ 하면서도 시험에 집중하고 싶어 하는 J의 고민을 듣고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먼저 J의 감정을 공감해 보았어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시험 앞에서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긴장의 다른 이름은 스트레스죠. 그러니까 J가 시험 앞에서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당연한 반응 같아요. 잘하고 싶을수록 긴장감은 커지는 거니까요. 긴장은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할 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해요. 긴장하게 되면 부담을 느끼고, 마음의 평정심(inner peace)이 깨져요. J의 경우 자기가 노력한 만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서질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것 같아요.
긴장과 부담이 가중되면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안개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이 불안이에요.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정적 결과를 예견할 때 힘이 세져요. “만약 시험을 망치면 어떡하지?”, “내가 저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급해져요. 추격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허겁지겁 도망가며 숨이 가빠지는 상태라고 할까요? 조급해지고, 초조해지고, 심장 박동이 쿵덕쿵덕 빨라지고, 머리 위에는 검은 먹구름이 끼면서 해야 할 일에 집중이 잘 안 되고, 몸은 축축 늘어져요. 불안이 증폭되면 자기 의심과 검열이 심해지고, 공부에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 대비 효율은 떨어져요. 시험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들면서 극단적으로는 직장을 떠나고 싶은 마음까지 들 수 있어요. 시험에서 도망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지금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가?'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에요.
J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과거 자신이 너무나 원하고 노력해서 들어갔던 곳이에요. J는 원래 주도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자기 성장에 필요한 경험을 찾아서 해왔어요. 지금도 퇴근 후에 이런저런 자기 계발을 하고 있죠. J는 시험을 코앞에 두고 찾아온 걱정거리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후의 결과에 대해 살짝 궁금한 마음도 내비쳤어요. 직장생활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요? 간절히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도 하루 이틀 지나면 평범한 일상이 되고, 조직에서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다 보면 직장생활의 재미가 떨어지는 거잖아요. 특히 직장에서 요구하는 것이 한 번에 여러 개일 때면 정신을 못 차리게 되죠. 한 번에 하나씩 업무가 주어진다면 잘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본래 인간의 뇌는 멀티 플레이(multi-play)를 싫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J와 비슷한 경험치가 제게도 있었는지 지난 직장생활을 되돌아보았어요. 처음엔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너무 즐겁고 꿈만 같아서, '이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꼬박꼬박 월급까지 받네' 하면서 감사하기만 했어요. 이런 감격은 잠시뿐, 경력이 쌓이자 교수로서의 본업 위에 학과를 관리하는 직책이 더하여지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부속기관의 장으로서 작은 조직을 경영까지 해야만 했어요. 하나의 직업도 제대로 하려면 힘이 드는데, 두세 개의 직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 가혹하기만 했죠. 여러 가지 업무를 잘하기는커녕 해내기도 힘들어서 퇴근은 점점 늦어지고, 심지어 집에 가서도 밤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워커홀릭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참기 힘든 고비가 올 때마다 주기적으로 퇴사를 고민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엉덩이 붙이고 일할 수 있었던 이유도 꼭 있어서 오랜 시간 견뎌 왔죠. '의미 있는 일치고 힘들지 않은 일 없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에요.
......할라면 했는데
할 뻔했는데
할 수도 있었는데
할 걸 그랬네
할 거기는 할 건데
한 적도 있는데
할라다 말았는데
할 바에야
해.......
장기하 노래 <해> 가사 중에서 -
J는 아마 제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마음을 짓누르던 부담에서 조금은 해방되었을 거예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속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진정 효과가 있으니까요. 조금 더 J의 마음을 토닥이고 싶어서 짧은 응원글을 써 보았어요.
J에게. 답답한 너의 마음을 내게 말해주어 고마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얼마나 긴장되고 떨릴까? 혹 시험을 망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 때문에 공부에 집중이 잘 안 되었을 것 같아. J의 촘촘한 2주 시험공부 계획을 보고 깜짝 놀랐어. J가 이 시험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말이야. J가 그토록 원해서 들어간 직장인데도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지금 이 상황이 싫어서 도망가고 싶기도 할 것 같아. 꼭 이런 숨 막히는 평가가 없더라도 내가 아는 J는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성장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시험이 없어도 J는 잘할 수 있어요"라고 알려주고 싶네. 공부하면서 ‘내가 잘 못하면 어떡하지?”하는 의심이 들 때면 지난날 J가 이루었던 빛나는 성취들을 떠올려봐. “와! 내가 이렇게까지 공부한 적이 있었구나. 이런 일도 해냈었지.” 하며 몇 가지 기억만 소환해 봐도 조금은 안심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때 해낼 수 있었다면 지금도 너끈히 해낼 거라고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될 거야. J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면, 저기까지도 분명 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꼭 기억해. 만약 이조차 생각하기 귀찮다면 2주 동안은 해야 할 공부를 그냥 ’해!‘. 할지 말지 고민해 봐도 결국은 할 거니까 그냥 ’해!‘. 시험이 끝나고 그냥 하니까 되더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래. 화이팅 !!
그냥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