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나 Oct 13. 2023

강한 부드러움

온유한 사람의 힘  

온유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퍼뜩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손주를 바라보는 조부모의 눈빛이다. 그의 눈동자는 하트 모양 같고 손주를 향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듯 환한 불이 켜져 있다. 조부모의 손주 사랑을 보면 표정부터 다르다. 눈꼬리는 어느 때보다 내려가서 금방이라도 웃을 준비 완료, 손주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벌써 두 손은 손뼉 치고 있다. 자녀에게 아무리 엄격했던 부모라도 손주가 태어나면 허용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아니 손주에게만큼은 '안돼'가 없을 정도로 너그럽다. 손주에게 사랑받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멋과 맛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만만함'이다. 나이 든 사람의 '만만함'은 사자의 웃음과도 같다. 사자는 웃고 있어도 가벼워 보이지 않지만, 토끼는 한껏 몸을 부풀리고 화난 표정을 지어도 귀엽다. 누군가 나를 만만하게 봐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 온유다.


아이에게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측정하는 자동 장치라도 있는 듯 기가 막히게 조부모의 조건 없는 무한 사랑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안돼'를 가르치는 부모에게는 눈치를 보지만 조부모 앞에서는 눈치 볼 일도 긴장할 일도 별로 없다. 조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은 일상에 단단히 조여 있던 고삐가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다. 조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사람에게 만만하게 보아면 '욱'하고 화가 나겠지만, 손주가 만만하게 대해주는 것은 오히려 친밀함의 표현인 듯싶어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한때 조부모에게 자유롭고 방자한 행동을 서슴지 않던 아이는 유치원과 학교에 가면서 집단생활의 위계와 규칙, 기본생활습관을 익히면서 사회화되고 행동이 점잖아진다. 아직 함께 살아가는데 적합하도록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는 일차적으로 반드시 부모에게 훈련받고 조련되어야 하지만,  조부모에게는 그저 사랑만 받아도 충분하다.  


교육현장에서 이솝 우화 [해와 바람]은 본래의 내용도 재미있지만, 후속 이야기 짓기를 하며 경쟁보다는 사이좋은 공존과 평화를  다루기에 좋은 콘텐츠다. 해와 바람이 누가 더 힘이 센가를 겨룬다. "저기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누가 먼저 벗기나 내기해 보자." 바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내기의 승자는 당연히 자기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큰 돌풍을 일으켜 지면의 모든 것을 날려 벼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이런 시시한 내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바람은  나그네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을 세게 더 세게 일으켜본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그네는 몸을 웅크리고 옷이 벗겨질세라 더욱 옷깃을 꼭 부여잡는다. 바람이 아무리 힘껏 용을 써봐도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다. 그때 해는 묵묵히 따스한 햇살을 나그네에게 비춘다. 비로소 따뜻해진 열기로 얼었던 몸이 녹고 기분 좋게 나른해진 나그네는 겉옷을 벗어 둘둘 말아 베개 삼아 베고 나뭇그늘에서 잠시 쉬어 간다.  해는 그저 따뜻하게 세상을 비추었을 뿐인데 바람과의 내기에서 이긴다. 온유는 타인의 마음을 스스로 열게 하는 따뜻함이다. 진정한 강함은 거칠 필요가 전혀 없다.


캐나다 로키산맥 밴프


로키산맥은 전 세계 사람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여행지 중 하나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자 캐나다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한 '밴프(Banff)'는 깎아지른 듯한 산들 사이를 유유하게 흐르는 호수로 인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감상할 수 있어 이곳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만약 이곳에 호수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투박하고 거친 산들 사이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호수의 물은 엄마의 품처럼 부드럽고 포근하며 고요하고 평화롭다. 물은 쉬지 않고 흐르며 산의 모양과 물길을 바꾼다. 결국 높은 산을 길들이는 것은 물의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움은 모든 것을 이긴다'라고 고백했던  로마 황제 막시 무스의 말이 떠오른다.




'만만하고 말랑말랑한', '따뜻한', '부드럽지만 강한' 온유의 개념과 상반된 단어와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사나운, 거친, 화를 잘 내는, 불만이 많은, 잘난 척하는, 날카로운, 예민한, 잔인한, 매정한, 차가운, 욱하는, 심술궂은, 깐깐한, 자기밖에 모르는..... 언제부터인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깐깐하게 따져 묻는 사람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회 분위기에 익숙하다. 이것은 무한경쟁 속에서 루저가 되지 않고 힘을 가진 강자로 살기 위한 처세라고도 한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미성숙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신체적 물리적 힘을 갖고자 애씀과 동시에 그러한 외부의 힘에 쉽게 영향받으며 굴복한다.


연령, 성별, 지위를 막론하고 유독 '내가 누군지 알고 네가 감히....'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기대하는 대접을 타인으로부터 받지 못할 때 맹렬한 분노가 일어난다. 타인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아도취는 갑질의 동력이다. 갑질은 자신의 우월한 지위나 힘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부당한 일을 강요하는 일련의 행위다. 자기는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고, 자기가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건 괜찮지만 타인이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자아도취적 생각은 해롭다. 혹 남에게 대접받게 되는 일이 있으면 감사한 것이고, 먼저 타인의 존엄을 염두에 둘 때 감히 무례한 언사를 삼갈 수 있다.


온유는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도취되지 않은 상태다.  그러할 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인간관계의 황금률을 맛볼 수 있다. 온유는 사랑받는 인격체로 살아가기 위해 품어야 할 태도다. 인간관계적 맥락에서 볼 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성경 말씀에서 '땅'의 의미는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성품이 온유한 사람은 타인에게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나와 너, 우리의 삶을 평화로 물들인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눈물 예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