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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나 Dec 08. 2023

기다림의 시간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탄절을 앞둔 12월의 4주간을 ‘대림절’로 지키며 특별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다. 헨리 나우웬의 [제네시 일기]에 보면 한평생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사님들조차도 성탄을 기다리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 자주 침묵이 깨지고, 성탄에 이르러서는 환희와 탄성이 터져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기다림은 설렘과 기쁨의 시간이다.      


만약 기다림의 대상이 언젠가 반드시 올 거라는 확신이 없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언젠가 기다리는 대상이 꼭 다시 올 거라는 믿음의 유무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현재'라는 시간의 질을 바꿔 놓는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처음 엄마와 떨어져 유치원에 올 때, 애착 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의 양상을 보인다. “엄마와 잠시 헤어져 있는 건 슬프지만 곧 다시 엄마를 만날 거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안정 애착 유아는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 뿐 아니라, 혼자서도 잘 놀고, 친구와 함께 하는 놀이에도 적극적이다. 유치원에서 제공되는 모든 교육 활동을 충분히 즐기며 밥도 맛있게 잘 먹는다.


반면 엄마와의 분리가 힘든 불안정 애착 유아의 경우에는 유치원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잘 웃지 않고, 무표정일 때가 잦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사소한 일에도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자주 엄마를 찾으며 울고 떼를 쓰거나, 간식이나 점심을 먹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가 진행 중이어도 좀처럼 몰입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몸은 유치원에 와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집에 머물러 있는 부조화 상태다.      



“엄마를 기다리며 나는 가만히 있는 법을 배웠어요. 고요한 산처럼요.”  장 샤오치.  <엄마를 기다리며>


대만 작가 장샤오치의 그림책 [엄마를 기다리며]에는 제목 그대로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코끼리가 등장한다. 아기 코끼리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엄마 코끼리를 기다리면서도 좀처럼 오지 않는 엄마가 보고 싶어 울거나, 화를 내거나,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앞에 놓인 ‘지금’이라는 시간 동안 만나게 되는 누군가와 함께 어떤 일을 한다.    

  

아기 코끼리는 아주 위험한 악어 연못을 건너가, 택배 아저씨를 도와 소포를 배달한다. 슈퍼마켓 일을 도와 빵집 아저씨에게 달걀을 배달한다. 나무에 올라가 고양이와 물고기 잡기 시합을 하고, 할아버지와 닮은 걸 발견하며 신기해하기도 한다. 주스 가게 아줌마를 돕고, 개미와 함께 케이크를 먹는다. 카멜레온에게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고, 예쁜 잎사귀로 만든 낙하산을 탄다. 작은 무인도를 발견해서 무려 여덟 주 동안 지내고, 교통정리를 해서 아빠 달팽이가 아홉 시간이나 빨리 집에 갈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고요한 산처럼 가만히 있는 법도 배운다. 드디어 기다리던 엄마 코끼리가 왔을 때, 아기 코끼리는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지으며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다.       


기다림은 우리를 현재의 순간으로 부른다. 굳이 톨스토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재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때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기다리면서도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을 때 평온하지만 능동적으로 자기 삶에 전념할 수 있다.      


마르크 샤갈. [노아의 방주](1966, 236×234cm). 마르크 샤갈 국립박물관. 니스. 프랑스.


마르크 샤갈의 명화 [노아의 방주]에는 그림 가운데 있는 노아의 뒤편으로 수많은 사람이 빼곡히 있다. 방주는 구원과 평화의 상징이다. 실제 노아의 방주에 탔던 인물이 몇 안 되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노아의 방주 안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고통받고 학살당했던 유대인들을 그려 넣었을까?  어떤 절대 권력도 인간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까지 파괴할 수는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수많은 유대인들은 샤갈의 [노아의 방주]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어쩌면 샤갈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의 피해자들을 자신의 그림에 소환함으로써, 이 땅에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대상이 언젠가 꼭 올 거라 믿는 마음에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이 비친다. 기다리며 현재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면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서 최선의 것을 찾고 만족하며 머무르는 법을 터득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힐 일도, 과거의 영화로움에 발목 붙들릴 일도 없다.


기다림이란 현재에 온전히 머물러, 현재를 충실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태도를 연마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다리던 일이 성취될 때, 기다림의 모든 순간이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대가 날
아무 말 없이 안아 주겠죠.
그 품 안에 아주 오래도록
  - 이승열 노래 <기다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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