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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l 31. 2023

예민함이라는 독특함

“아빠, 혹시 내가 좀 예민해?”


예민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친구들보다 외부 자극에 더 빠르고 강하게 반응하는 게 보였다. 나는 복도 끝에 나타난 실루엣만 대강 봐도 누군지 금방 알았다. 교실 너머에서 담임 선생님이 걸어오는 소리를 누구보다 먼저 들었다. 제대로 빨지 않아 대걸레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제일 심하게 느꼈다. 손으로 쓰윽 훑으면 친구들 등에 뭉친 부분을 금방 찾아냈다. 하루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혹시 내가 좀 예민해?”



아빠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네가 왜 예민하냐고. 아빠는 눈이 약간 커졌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았다. 애써 차분해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단어와 우리 아이는 절대 연관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반응.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예민하다’ 단어의 의미를 생생하게 느꼈다. 편안하다, 너그럽다 같은 긍정적인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 까칠하다, 신경질적이다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과 찰떡궁합인 말. 



© engin akyurt, 출처 Unsplash



예민하다는 말은 다시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둔감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소망과 현실은 달랐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지, 느껴지는 감각 자체를 차단할 수는 없었다. 나는 사무실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공기의 질감으로 느낀다. 누군가 부장에게 크게 혼나고 있으면 삽시간에 공기가 바싹 마른다. 조직이 많이 바뀌는 인사 발령이 코앞이면 사무실 공기는 둥실둥실 떠오른다. 



사무실 분위기도 그런데, 가까운 관계일수록 얼마나 변화를 잘 느끼겠나. 과거 애인의 표정이나 몸짓이 평소와 달라지면 그냥 무시하지 못했다. 혹시 나 때문인가 싶어 혼자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십 대 후반 만났던 애인은 나에게 ‘정말 예민하다.’라고 말했다. 내가 자기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게 싫다고 했다. 내가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도, 그는 내가 자신을 계속 살피는 것을 알았던 거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가 나보다 예민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나의 예민함이 미워졌다.



삼십 대 중반, 세 살 한 살이었던 아이들은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귀를 찢어버리는 듯한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거실에 놔두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버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 아이들이 작은 손으로 내 목을 자꾸 만지면, 나는 견디다 못해 짜증을 내곤 했다. 자책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스스로도 피곤하고, 주위 사람들도 불편하게 만들고, 아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망할 예민함 때문이었다. 예민함은 점점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 Alexis Brown, 출처 Unsplash


예민함에 대한 나의 오랜 미움을 바꿔준 것은 글쓰기 선생님이었다. 그는 글쓰기를 할 때는 오히려 예민해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했다. 감각을 받아들이는 레이더를 공작새처럼 펼치라고 말했다. 풍부하게 느끼면 더 섬세하게 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좋은 글이 나온다고. 나는 처음으로 이 기질이 어딘가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을 억눌러 왔던 마음속 무거운 돌을 치웠다. 돌 대신 여닫이문을 달고, 시험 삼아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감각이 조금 어색했지만, 마냥 밉지 않았고 살짝 반가웠다. 



나는 적어도 글을 쓸 때만은 부채감 없이 양껏 느끼기 위해 마음속 문을 활짝 열었다. 최대한 자세히 묘사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검은색으로 그러데이션이 지는 해 질 무렵 하늘에 대해, 삐룩삐룩 삐루루루 하고 지저귀는 동네 새소리에 대해, 초여름 바람에서 풍기는 싱싱한 냄새에 대해, 늙은 호박고지나물의 쫄깃하고 고소한 맛에 대해, 비 오기 직전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눅눅한 감촉에 대해. 그 순간을 떠올리며 오감을 열고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구체적으로 느끼고 쓰는 연습이 쌓일수록, 칭찬 기술도 늘었다. 지난주에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을 들고 와서 나에게 자랑했다. 나는 그림을 재빨리 훑어보며 어느 부분이 유난히 돋보이는지 찾았다. “우리 차 내부를 세밀하게 잘 그렸구나. 핸들 모양이랑 계기판까지 우리 차랑 똑같네. 옆에 내비게이션은 화살표 모양이랑 진행 방향을 보니까 ‘주행 방향 3D’모드로 설정되어 있나 봐. 어쩜 에어컨 바람 나오는 구멍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잘 그렸어?”라고 칭찬했다. 



누군가 간식을 나눠주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에 지인이 ‘이 두유가 언니 취향에도 딱 맞을 것’이라며 두유 한 팩을 건넸다. 과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했을지 궁금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다 먹고 나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통 두유는 달아서 콩 맛이 묻히기도 하는데, 이 두유는 달지 않아서 콩의 고소함이 더 잘 느껴졌어. 너무 묽지 않고 약간 꾸덕한 것도 좋다. 역시 우리 ㅇㅇ가 내 취향을 잘 아네. 덕분에 속이 든든해졌어.”  



©  Matteo Vistocco, 출처 Unsplash



내가 구체적으로 칭찬하면 상대방은 무척 기뻐한다. 단순히 예의를 차리려는 게 아니라, 진정성 있게 자신에게 집중해 준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나의 감각이 예민한 덕분이다. 칭찬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걸 고려하면, 빠르게 차이를 식별하는 눈, 코, 입, 귀, 손의 도움이 크다. 예민한 오감이 어떤 식으로 나에게 힘이 될 수 있는지 알고 나서야, 나는 내 감각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철학자 고병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존재들은 서로 비교를 불허하는 독특함을 가졌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덕을 지녔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힘’을 이해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 자체에서 수반될 수 있는 ‘약점’이나 ‘곤경’을 아무런 ‘악의’ 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p.45, 〈힘을 보라〉, 《철학자와 하녀》) 



그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다시 말해 섬세하고 민감한 사람일 뿐이다. 가끔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너무 클 때는 약 상자에 있는 솜으로 잠시 귀를 막는다. 그러면 볼륨이 줄어서 훨씬 편하게 아이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약점’에서 ‘힘’을 얻고, 때때로 닥치는 ‘곤경’을 나만의 방식으로 조율해나가는 중이다. 소망 했던 대로 둔감한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아쉽지 않다. 나는 예민함에 나름의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독특함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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