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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Oct 09. 2023

사랑과 유전질환과 글쓰기에 대하여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차일드》를 읽고

#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버틀러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백인 남성 작가들만 있던 SF계에서 성공을 거둔 손꼽히는 흑인 여성 작가이다. 《블러드차일드》는 단편과 작가 후기, 에세이가 수록된 유일한 작품집이라고 한다. 표제작 〈블러드차일드〉는 SF계의 권위 있는 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말과 소리〉도 휴고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출간된 지 벌써 28년이 지났지만, 소설들은 조금도 뻔하거나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해보면 의견이 다양하게 나올 장면들이 많아서, 독서모임 하기에도 좋을 만한 책 같다. 



*

〈블러드차일드〉는 인간(테란)이 외계생명체(틀릭)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이야기다. 보호구역에 살게 해주는 대가로 틀릭들은 테란의 몸을 이용해 번식한다. 틀릭은 '임신'을 시키는 대상으로 주로 테란 남자를 고른다. 여자들의 몸에 알을 심으면 테란이 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을 몸에 심은 남자들은 외계생명체의 대리모(몸 속에서 생명을 키운다는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모)가 되어 유충이 일정 크기까지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출산'은 틀릭의 침으로 마취시킨 상태에서 마치 제왕절개처럼 몸을 갈라 이루어진다. 주인공 테란 남자아이는 자신을 보호해 온 틀릭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무엇이죠? 우리는 당신에게 뭐죠?"(p.45) 



테란은 보호구역에서 살려면 가족 중 누군가가 틀릭의 알을 '임신'해야만 한다. 하지만 '출산'할 때 유충을 옮겨둘 소 같은 동물이 주위에 없다면 유충의 먹잇감이 되어 죽을 수도 있다. 틀릭의 알은 테란이 아닌 다른 동물에게 심었을 때 대부분 유충이 되기 전에 죽어버렸다. 테란과 틀릭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인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작가 후기에 이 소설을 '아주 다른 두 존재 간의 사랑 이야기'(p.54)라고 적었다. 현실에서도 사랑은 반드시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재력과 권력이 필요해서 사랑하는 경우도 있고, 또는 물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의지가 필요해서 사랑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테란과 틀릭의 관계도 사랑의 한 형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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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과 아침과 밤>에서는 '듀리에-고드 질환(DGD)'라는 유전병 때문에 인간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대부분의 암과 바이러스를 치료해 주는 특정 약으로 치료받은 사람이 한 쪽에라도 있었다면 자식이 DGD를 갖고 태어난다. DGD를 가진 사람은 규정된 음식만 먹어야 하고, 살다가 어느 순간 DGD가 발현되면 자해를 시작한다. DGD가 있는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DGD를 갖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DGD가 있는 사람은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 질문은 현실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겹쳐진다. 우리나라 모자보건법(*1)은 사실상 장애를 가진 부모가 아이를 낳을 권리를 제한하는 효과를 가진다. 장애 여성들의 인터뷰에서도 불임 시술을 권유받은 장애 여성의 사례 등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2) 



소설의 주인공 앨런과 린은 임신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 

"우리처럼 DGD병동에서 손가락을 물어뜯는 이들만 늘어날 뿐이야."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나보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달갑지는 않아."(p.67)

현실에서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으면 당장 부딪칠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집 앞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목숨을 걸고 휠체어 리프트를 타야 할 수도 있고, 시력을 잃었는데 식당 안에 키오스크밖에 없어서 주문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학교를 가려 해도 지역 주민들이 설립을 반대할 수 있고, 취업을 해도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소설 속 DGD가 발현된 환자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DGD병동처럼 묶어놓고 통제하는 대신 넓은 대저택에 만들어진 '딜그'라는 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이곳에서 DGD 발현 환자들은 스스로를 죽음까지 몰아가는 자해 행동을 통제하며 창작 활동에 몰두해 발명도 하고 예술품도 만들어 낸다. 주인공 린은 '딜그' 시설에서 자신이 여생을 보내는 미래를 그린다. '딜그'에서라면 DGD 발현 환자들에게는 폐쇄병동이나 죽음만 남은 것이 아니다. 픽션이 현실에도 반영될 수는 없을까.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할 때 임신이라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장애인이 자기 자신을 그대로 존중받으면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장애라는 단어가 더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

〈긍정적인 집착>과 〈푸로르 스크리벤디>는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다. 집착은 보통 부정적인 단어로 쓰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긍정적인 집착이란 무척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의미이다. "당시 직업으로 SF를 쓰는 작가는 거의 백인 남자였다. 아무리 SF와 판타지를 사랑한다 해도, 내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글쎄, 어쨌든 그만둘 수 없었다. 긍정적인 집착이란 두렵다거나 의심이 가득하다는 이유만으로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 긍정적인 집착은 위험하다. 그것은 아예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p.272) 옥타비아 버틀러 외에 SF를 쓰는 흑인 여성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지 끊임없는 자기 의심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는 계속 썼다. 긍정적으로 집착한 덕분이다.



〈푸로르 스크리벤디>에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글쓰기 팁이 들어 있다. "습관은 당신이 소설을 끝내고 연마하게 도와줄 것이다. 영감은 그렇지 않다. 습관은 실제로 나타나는 집요함이다."(p.279) "당신은 필요한 상상력을 다 갖고 있으며, 당신이 실행할 읽기와 일기 쓰기와 배움 모두가 그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 물고 늘어져라."(p.280) 나도 스스로가 꾸준히 무언가를 지속하고 있을 때 가장 뿌듯하다. 나에게 영감이나 재능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물고 늘어지는 끈기뿐이다. 2018년 가을부터 서평을 썼으니, 올해로 7년이 되었는데 크게 실력이 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쌓다 보면 언젠가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집요함을 품으며 오늘도 이렇게 썼다. 




(*)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2) 김재왕, '출산을 결정하는 여성, 여성을 결정하는 사회, 사회를 마주하는 장애', 비마이너, 2015.12.26.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9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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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회색 천 위에 책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책 오른쪽에는 흰색 꽃송이가 세 개 있다. 책 표지는 빨간색이고 상단 중앙에 제목 '블러드차일드'와 저자명 '옥타비아 버틀러'가 쓰여 있다. 그 아래에는 흑백사진이 있다. 사람의 머리부터 목까지의 옆모습이다. 기계 부품으로 구성된 머리 뒤쪽 단면이 보인다. 사람의 옆모습 뒤쪽으로 커다란 수레바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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