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 Sep 28. 2023

그게 핵심이야, 엔딩이 없게 만들었거든

영화 <바비>를 보고

#바비 #그레타거윅

#네이버시리즈온



한때 나는 피아노 곁에서 매일 놀았다. 피아노를 치기도 했지만, 피아노 의자의 뚜껑도 자주 열었다. 뚜껑을 열면 피아노 책 대신 바비인형이 있었다. 부모님은 인형의 집을 사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피아노 의자 안에 인형의 집을 만들었다. 핑크색 색종이를 알록달록 오려 꾸민 그 집에서 나는 상상 놀이에 빠졌다. 피아니스트, 배우, 의사, 교사가 되어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는 나의 아름다운 친구였다.


.

바비, “현실 세계는 완전히 영망”


영화 <바비>에는 “바비랜드”가 나온다. 바비랜드에서 사는 바비들은 대통령부터 대법관, 국회의원, 물리학자까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고, 인종도 다양하며 휠체어를 탄 바비도 있다. 바비들은 “마음 먹은 건 뭐든 전부 이룰 수 있는 여성”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 이하 “*바비”)가 갑자기 자신이 이상해진 것을 느낀다. 마치 아이가 사춘기가 찾아와 자신의 삶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비”는 ‘평범한’ 바비로 돌아가기 위해 현실 세계로 가서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사람을 찾는다.


“*바비”는 바비들이 “페미니즘과 평등권 문제를 해결”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현실 세계로 들어가자마자 믿음이 산산이 조각난다. “*바비”는 “네가 나오고 여자들은 죄책감을 느꼈”으며 바비가 “페미니즘 운동을 50년 퇴보시켰고 여자애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비랜드와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는, 심지어 바비를 만든 회사 마텔에도 여성 임직원이 없는 현실도 목격한다. “*바비”는 급기야 “현실 세계는 완전 엉망”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나도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바비가 이전처럼 아름다운 친구로만 보이지 않았다. 인형은 팔려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다. 즉, 바비는 사람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외모와 몸을(또는 이상적이라고 정의되는 외모와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눈이 큼지막하고, 쌍꺼풀이 길며, 가슴이 크고,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얇고, 다리가 가는 바비는 계속 팔리면서 “비현실적인 외모 이상화”를 계속 강화시킨다. 바비는 여성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여성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

켄, 바비랜드의 켄이자 현실 세계의 바비


여기에서 영화의 중요한 등장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바비의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켄”이다. 켄은 바비랜드에서는 바비가 “바라봐 주어야 존재 의미가 있”는 캐릭터이다. “그냥 켄만으로는” 켄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켄이 “*바비”와 함께 현실 세계로 갔다가 가부장제에 눈을 뜬다. 그는 바비랜드로 혼자 먼저 돌아와 가부장제를 모두에게 전파한다. 바비랜드는 남성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현실 세계의 복사판 Kendom(켄덤)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는 켄에게서 현실 세계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켄은 현실 세계에 갔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거기서 난 중요한 사람이었어. 길을 걸으면 날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줬어.” 외모나 몸의 ‘아름다움’ 정도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지 않는 것.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여성의 역할(◆)을 기준으로 재단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바라던 바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바비가 “켄 다움을 찾을 때가 온거야. 켄, 나를 뺀 너를 찾아야 해.”라고 말하는 부분이, 현실 세계의 여성들에게 바비가 하는 말처럼 들렸다.


◆ <바비>의 주요 등장인물 글로리아가 “*바비”에게 했던 말을 참고하면 좋다. 길지만 영화 속 대사를 그대로 인용한다.

“여자로 사는 거 진짜 힘들다. 이렇게 아름답고 똑똑한데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마음이 찢어져. 우린 항상 비범해야 하는데 언제나 잘못하고 있지. 마르되 너무 마르면 안 되고. 건강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말라야지. 돈은 필요한데 돈 얘긴 안 돼, 속물 같거든. 결단력 있지만 성격도 좋고 앞장은 서되 남들 생각도 포용해야지. 엄마라 행복해야 하지만 자식 얘기만 하면 안 돼. 일도 잘하면서 배려심도 있어야 해. 남자들 행실도 책임지래. 미친 거지. 지적하면 불평한다고 욕이나 먹어. 외모 관리는 필수지만 너무 예뻐서 남자를 부추기거나 여자의 적이 되면 안 돼. 여성과 연대하면서도 튀어야 하거든. 항상 감사하되 불평등한 사회란 걸 잊어선 안돼 그니까 그걸 인지하는 동시에 감사해야지. 늙어서도 안 되고 무례도 잘난 척도 금지. 이기심도 좌절도 안 되고. 실패도 두려움도 돌발행동도 절대 금지야. 너무 어렵고 모순투성이지만 포상도 감사 인사도 없어. 그리고 결국엔 내 방법은 다 틀렸고 전부 내 잘못이래. 나 포함 모든 여자가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자길 옥죄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여자란 이유로 인형도 그런 일을 겪는다면 대체 어떡해야 해?”


.

전세계 바비의 수만큼 많고 다양한 엔딩을


“*바비”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불러냈던 글로리아의 도움으로 켄덤을 바비랜드로 돌려놓는다. 이제 그는 “전형적인 바비”로 돌아간 걸까? 하지만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엔딩이 없나 봐.” 그때 마텔에서 바비를 만들어 낸 루스 핸들러의 유령이 등장한다. “그게 핵심이야. 엔딩이 없게 만들었거든.” “*바비”는 루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원하는 걸 깨닫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바비”의 발걸음이 무척 경쾌하다.


바비랜드의 바비들과 켄들의 일상도 달라질까? 켄들은 대통령 바비에게 요청하여 하원 의석을 한자리 얻는다. 내레이터는 켄들의 지위도 시간이 지나면 올라가지 않겠냐고 덧붙인다. 현실 세계의 여성들과 바비랜드의 켄들 중에서 누가 더 먼저 ‘뭐든 될 수 있다’는 감각을 몸으로 겪어볼 수 있을까. 현실 세계에는 간혹, 바비가 그려내는 모습들이 실현될 때가 있다. 영국의 총리 마거릿 대처, 미국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이자 비행사인 권기옥 같은 이름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세계 여성 국가지도자를 나열해도 채 150명이 되지 않는다. (위키피디아-여성지도자 페이지 참고)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유별나게 출중하고 굉장히 운이 좋은 여성들만 대표가 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나는 “*바비”의 엔딩처럼 현실 세계의 여성들에게도 예측할 수 없이 다양하고 풍성한 엔딩이 가능해지면 좋겠다. “적어도 바비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집에 돌아온 소녀가 피아노 의자 속 바비와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영화리뷰 #인형놀이 #대체텍스트 #영화스타그램 #페미니즘 #마고로비 #라이언고슬링 #아메리카페레라



(대체 텍스트) 영화 포스터다. 분홍색 오픈차를 운전하는 바비가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 머리를 쓸어넘기며 미소짓고 있다. 켄은 뒷좌석에 앉아 흐뭇한 미소로 바비를 바라본다. 바비 위로 제목 'Barbie 바비'가 커다랗게 쓰여 있다. 그 위로 작은 하얀 글자로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켄은 그냥 켄'이라고 쓰여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숨 걸고 연애하고 싶지 않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