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이정환의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를 읽고
#헤어지자고했을뿐입니다 #교제살인
#이주연 #이정환
그는 SKY를 졸업했고 전문직 자격증이 있었다. 누구나 아는 회사에 다녔고, 상냥했으며 배우 느낌이 살짝 날 정도로 외모도 준수했다. 주변에서는 결혼해도 좋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6개월 정도 만나고 이별을 결심했다. 그는 내가 모든 면에서 자신의 기준에 꼭 맞는 여자가 되기를 바랐다. 나는 숨이 막혔고 새장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말하기로 마음을 정했던 날, 그와 식당이 여럿 있는 쇼핑몰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빠, 우리 이제 그만 만날까."
순간 나와 마주 보고 앉았던 그가 새하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드라마처럼 나도 얼굴에 물벼락을 맞는 건가. 그런데 이 사람 표정이 너무 험악한데 어쩌지. 이렇게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 때리지는 않겠지. 별별 생각이 다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 치면서 일어나더니 먼저 음식점을 나갔다. 그제야 나는 몸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그의 번호와 카톡을 모두 차단했다.
내 친구는 실제로 애인에게 맞았다. 그녀는 그 사람의 차에 둘이 있을 때 이별 통보를 했다. 나의 상황처럼 개방된 공공장소가 아니었다. 그 사람도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얼굴색이 변했고 내 친구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정말 다행히도 폭력은 한 번으로 끝났고 그는 그 이후에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친구가 그 기억에서 완벽하게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이주연, 이정환 기자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일어난 '교제살인' 판결문을 찾았다. 이들은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명확한 정황이 담긴 판결문만 포함했다. 이러한 조건으로 검색했을 때 3년 안에서 찾아낸 교제살인 판결문 중 남성이 여성을 죽인 사건은 108건이었다. (여성이 남성을 죽인 사건은 2건이었다.) 사나흘에 한 번씩 여성들이 남성과 사귀다가 죽었다.
20대에서 60대 이상까지 피해자의 연령도 다양했다. 저자들은 3년간 작성된 총 1,362쪽의 판결문을 분석하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맨 뒤에는 108명의 사망일과 사망 경위가 하나하나 적혀 있다. 그녀들은 목을 졸렸고 발에 밟혔고, 주먹·의자·골프채·소주병·망치로 맞았고, 식칼·회칼·커터칼에 찔렸다. 그녀들을 죽인 가해자인 남자들은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까지 다양하게 형을 선고받았다. 반성문 쓰고 탄원서 내면 감경, 심신미약이라고 감경, 술 먹었다고 감경되는 등 일관된 양형기준이 적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연애 중 폭력을 당했을 때는 도망칠 곳이 없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점이다. 애인 관계는 집과 회사, 주로 가는 장소까지 동선을 모두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여성은 집에서조차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2021년 4월에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다음은 '23.7.11.개정된 스토킹처벌법의 일부다.
ㅁ 4조(긴급응급조치)
✔ 100미터 이내 접근금지, 핸드폰 등 연락금지
→ 1개월 초과 불가
ㅁ 9조(잠정조치)
✔ 서면 경고, 100미터 이내 접근금지, 핸드폰 등 연락금지
→ 접근금지&연락금지는 3개월 한도(연장하여 최장 6개월)
✔유치장 또는 구치소 구금 → 구금은 1개월 초과 불가
ㅁ 18조(스토킹범죄): 스토킹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ㅁ 20조(벌칙): 잠정조치 중 접근금지 or 연락금지 위반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유치장 구금은 법원의 인용률이 높지 않다. (*) 2022년 10월부터 2023년 7월까지 1,137건 가해자를 구금시켜달라는 신청이 들어왔지만, 법원은 절반도 안 되는 건만 승인을 해주었다. 잠정조치 중 접근금지나 연락금지는 법원에서 90퍼센트 이상 승인하지만, 가해자가 위반한 건수가 같은 기간('22.10.~'23.7.) 동안 494건에 달했다. 가해자가 금지를 지킨다고 해도 최장 6개월까지만 효력이 있는데, 정말 피해자는 6개월만으로 안전해질 수 있는 걸까. 피해자의 인권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법이 개정되어야 하겠다.
(*) 김가윤 기자, '폭행 신고 2번, 접근금지…그리고 스토킹범이 집을 찾아왔다', 한겨레, 2023.09.12.
이 책에 나온 미국 덜루스의 '가정폭력 개입 프로그램 DAIP' 같은 민간단체 주도의 시스템도 필요할 것 같다. DAIP는 의무체포제, 위험성 평가 및 주거·교육·고용 등 종합적 피해자 지원으로 구성된다. 의무체포제는 피해자에게 폭력(언어적,정신적 폭력 포함)을 휘두른 가해자는 72시간 동안 구속되는 제도이고, 위험성 평가는 경찰조서를 검찰과 법원 등에 공개하여 피해자의 경험과 맥락을 담는 것을 중요하게 고려할 수 있게 만든 제도다. 검사에게 신청하고 법원에서 인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민간단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도 22년 9월에 신당역, 23년 7월에 인천에서 스토킹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여성을 상대로 일어난 폭행·강제추행·강간·살인 범죄는 34만 9946건"으로, "1시간에 8명꼴로, 7.5분마다 여성 한 명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나도, 내 친구도 위험에 처하고 싶어서 연애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누구나 연애를 시작할 때 목숨을 위협받을 상황이 발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가 충분히 뒷받침되어서, '헤어지자'라는 말을 건넸을 때, 단 한 명도 목숨을 위협받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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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텍스트, 이미지 설명) 갈색 바탕 위에 상단 중앙부터 시계방향으로 겹쳐진 엽서 세 장, 미놀타 필름 카메라, 책 표지가 띄워진 핸드폰, 펼쳐진 누런 무선 수첩이 있다. 핸드폰에 띄워진 책 표지에는 눈에 멍이 들고 울고 있는 여성의 목을 커다란 갈색 손이 움켜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성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한 방울마다 다 여성 한 명씩의 형상을 띄고 있다. 책 표지 좌측 상단에 제목인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와 부제 '교제살인, 그 108명의 죽음'이 있다. 책 표지 좌측 중앙에 세로로 '이주연·이정환 지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