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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Aug 17. 2023

3R 지나 4R, 5R…

2W매거진 <전지적 로맨스 시점>을 읽고

#2W매거진 #전지적로맨스시점



삐익ㅡ 타이머가 울렸다. 


연우는 가쁜 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저녁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운동을 한다. 오늘의 한 세트는 팔 벌려 뛰기 100번, 버피 20번, 윗몸일으키기 20번. 한 세트는 1라운드. 그녀는 20분 동안 4라운드를 끝내고 팔 벌려 뛰기 10번을 더 했다. 연우는 다이어리 오늘 날짜 아래 '4R 10'이라고 적었다.


이제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12월 12일에 엑스 표시를 하며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며칠 지났지? 다이어리 속지를 11월로 넘기고 11월 20일부터 손가락을 짚어가며 12월로 넘겼다. 그와 헤어진 지 삼주 하고도 이틀이 지났다. 일주일이 1라운드라면, 오늘은 '3R 2'이기도 했다. 20분이면 4라운드도 넘기는데 현실에서는 고작 3R 2밖에 되지 않았다니.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연우는 그의 몸에서 나던 비누 향을 떠올리다 멍해지고 말았다. 그의 목에 자기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시간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

연우는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최우선이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우선 순위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연우가 그에게 한 순간도 첫 번째가 되지 못한다는, 그 감각을 마주하는 건 몹시 쓰라렸다. 한 달 전에 약속을 잡아도 만날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일. 일. 그놈의 일. 


시작할 때부터 조짐은 있었다. 그가 평일에 휴가를 내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주말에도 각종 워크숍과 회의가 수시로 잡혔다. 연우는 스스로 인내심이 많다고 자부했다. 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녀의 자신감은 바닥을 보였다. 아쉬움에 속상함이 얹어지고, 약간의 짜증과 커다란 체념이 따라왔다. 


"정말 미안해. 방금 불러서…사장이 내일까지 하라고…" 

그날도 그랬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연우는 순간 바늘로 쿡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처럼 다정했고, 분명 속상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오빠, 우리 그냥, 이렇게 무리하지 말자."

연우는 자기 목소리에 묻어있는 서늘한 차분함을 느끼고 스스로 놀랐다. 


*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3R 2의 잔상을 털어내고 드라이기를 꺼냈다. 


며칠 전 세탁해 둔 이불에서 상쾌한 냄새가 났다. 연우는 침대에 파묻혀 서점 앱에 접속했다. 잠들기 전까지 그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면 뭐라도 읽어야 했다. AI는 제목에 로맨스가 들어간 책을 추천하고 있었다. 《전지적 로맨스 시점》이라니. 평소에 로판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인가.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살짝 원망했다. 그럼에도 연우는 AI의 추천을 믿어보기로 했다. 3천원이라는 가격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달콤한 걸 좋아하냐는 첫 문장을 읽고 아무래도 덮어야겠다, 싶었지만 그 다음 장의 '때로는 그 달콤함으로 쓰디쓴 현실을 잠시 잊을 수'(p.6) 있지 않겠냐는 말에 기대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마냥 달콤한 에세이만 들어있는 건 아니었다. 연우는 염장 지르는 얘기만 가득할까 봐 높이 올려두었던 가드를 슬슬 내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제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뭉근하게 익은 밥알을 꼭꼭 씹을 때 날 만한 단맛을 내는 오래 된 로맨스도 꽤 있었다. 멜로드라마에서 아침드라마로 넘어갔다는 비유에 그녀는 피식피식 웃었다. 연우는 마음 속에서 여기까지가 로맨스야, 라고 세워놨던 울타리가 조금씩 더 밖으로 공간을 넓혀가는 것을 느꼈다. 


연우는 그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심장을 꽉 쥐는 것처럼 지릿하게 아팠다.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언젠가는 《전지적 로맨스 시점》의 작가들처럼 그녀만의 로맨스를 찬찬히 글로 남길 수 있기를 소망했다. 오늘은 3R 2이지만 내일은 3R 3이 될 거다. 3R가 지나 4R, 5R. 12R 쯤에는 연우도 쓸 수 있게 될까. 그리고 라운드를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면 어떤 기분일까, 그녀는 잠시 미래의 자신을 그려보았다. 



#아미가출판사 #여성들의이야기 #전자책 #여성에세이 #대체텍스트 #북스타그램 #서평



(대체 텍스트, 사진 설명) 흰색 원목 책상 위에서 한 여성이 팔을 올려놓고 양손으로 흰색 태블릿을 쥐고 있다. 여성의 왼손 옆에는 파란 접시에 담긴 여러 가지 모양의 동그란 초콜릿과 흰 머그잔에 담긴 카페라테가 있다. 사진은 여성의 입장에서 자기 손을 내려다보는 각도다. 태블릿에는 2W매거진 33호 표지가 띄워져 있다. 표지는 갈색이고, 제목인 '전지적 로맨스 시점'이 좌측 상단에 쓰여 있다. 표지에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모양이 있고, 그 안에 사진이 들어가 있다. 사진에는 흰 벽을 배경으로 분홍색으로 피어있는 꽃이 네 송이 있다. 사진 아래에는 VOLUME 33, APR 2023이 있다. 표지 중앙 하단에는 작게 2w매거진 로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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